필통을 정리하다가 같은 모델의 볼펜이 세 자루라는 걸 발견했다. 잉크가 다 되면 리필심 대신 매번 새 펜을 샀던 흔적이다. 리필이 있는 줄 몰랐던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본체를 샀을까. 게으름이라고 결론 내리기 전에, 그 게으름이 실제로 얼마짜리인지 한번 계산해 보기로 했다. 결과는 예상과 조금 달랐다. 답은 펜에 따라 다르다였고, 그 갈림길이 이 글의 주제다.
가격 구조가 두 종류다
시중 가격들을 모아 스프레드시트에 정리해 보니, 펜의 세계는 리필 관점에서 두 부류로 나뉜다는 게 보였다. 저가 펜은 본체 가격과 리필심 가격이 거의 붙어 있다. 본체가 천 원인데 리필이 칠팔백 원인 식이다. 이 구간에서 리필은 경제 행위가 아니라 그냥 취향의 문제다. 그립이 길든 몸통에 정이 들었든, 돈으로는 딱히 정당화가 안 된다. 중가 이상의 펜은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본체는 만 원인데 리필은 이삼천 원처럼 리필이 본체의 몇 분의 일 가격이 되면서, 몇 번만 리필해도 본체 값을 회수하는 산수
회의실에서 만년필을 꺼냈다가 조용히 다시 넣었다. 회사 복사지 위에서 내 글씨가 수염 난 얼룩으로 변하는 걸 봤기 때문이다. 같은 펜이 집의 노트에서는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게 구르는데, 종이가 바뀌자 완전히 다른 도구가 되어버렸다. 만년필은 왜 이렇게 종이를 가리는가. 그동안 이 블로그에서 조각조각 다뤄온 이야기들이 사실 하나의 지도로 모인다는 걸 깨달았고, 오늘은 그 지도를 그려본다.
전제, 만년필은 잉크를 쏟아붓는 도구다
출발점은 잉크 방출량이다. 볼펜의 유성 잉크가 고점도 잉크를 볼로 조금씩 굴려 바르는 방식이라면, 만년필은 저점도 수성 잉크를 모세관 현상으로 흘려보내는 방식이다. 단위 길이당 종이에 도달하는 액체의 양이 필기구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라, 볼펜이 아무 종이에서나 무난한 반면 만년필은 종이의 모든 약점을 사정없이 들춰낸다. 종이를 가리는 게 아니라, 종이의 실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세 가지 참사, 원인을 나눠 본다
복사지 위의 참사를 분해하면 사실
손글씨를 몰아 쓴 날이면 중지 첫마디에 펜이 지나간 자국이 남는다. 오래 눌린 살이 조용히 항의하는 흔적이다. 늘 손버릇 문제라고만 생각했는데, 필기구 인체공학 자료들을 읽다가 관점이 완전히 바뀌었다. 손이 펜에 맞추느라 치르는 비용의 상당 부분을 사실은 펜의 스펙 세 가지가 청구하고 있었다. 지름, 소재, 그리고 무게중심이다.
변인 1, 지름은 가늘수록 세게 쥐게 만든다
직관과 반대인 지점부터 시작해 보자. 가는 펜이 가볍고 편할 것 같지만, 쥐는 힘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불리한 쪽이다. 그립이 가늘수록 손가락이 더 오므라들고, 오므라든 손은 같은 제어를 하기 위해 더 강하게 쥐어야 한다. 통용되는 인체공학 가이드들이 필기구 그립 지름으로 10mm 안팎 이상을 권하는 이유가 여기 있고, 손이 크거나 필기량이 많을수록 굵은 그립의 이득도 그만큼 커진다. 물론 반대급부도 있다. 굵은 그립은 세밀한 획 제어에서 정밀도를 조금 내준다. 가는 펜이 여전히 제도나 세필의 세계에 남아 있는
만년필 잉크가 떨어졌다는 친구의 두 번째 상담이 왔다. 첫 상담은 닙이었는데, 이번 질문은 리필이다. 카트리지를 계속 사는 게 나을지, 아니면 컨버터라는 걸 사야 할지. 좋은 질문이다. 취향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 절반은 산수 문제라서, 산수부터 하고 취향을 얹는 순서가 맞다. 결국 또 시트를 열었다. 두 번째 상담부터는 시트가 열리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두 방식의 구조
카트리지는 잉크가 담긴 일회용 플라스틱 탱크다. 펜에 꽂으면 내부 침이 막을 뚫으면서 잉크가 흐르기 시작한다. 다 쓰면 버리고 새것을 꽂으면 그만이라, 잉크를 직접 만질 일이 없다. 컨버터는 같은 자리에 꽂는 재사용 탱크다. 피스톤이나 스크류를 돌려서 병잉크를 빨아들이는 구조로, 잉크는 병에서 사와 직접 채운다. 하드웨어로 치면 내장 배터리와 충전지의 관계쯤 된다.
손익분기의 산수
공개된 시중 가격으로 대략 계산해 본다. 브랜드나 환율에 따라 달라지니 자릿수 감각으로만 읽으면 된다. 카트리지는 개
도서관에서 빌린 책 이야기는 아니다. 빌린 책에 형광펜을 긋는 건 그 자체로 범죄니까. 내 얇은 사전에 형광 줄을 그었더니 뒷장의 단어 세 개가 노란 배경을 얻어버렸다. 앞장을 강조했는데 뒷장이 멋대로 편집된 셈이다. 얇은 종이와 형광펜의 조합은 왜 항상 이런 참사로 끝나는지, 그리고 매대에는 대안이 있는지, 스펙을 모아 따져봤다.
참사의 구조, 두 사건이 겹친다
평량 글에서 나눈 용어를 다시 쓰면, 얇은 종이 위의 형광펜은 비침과 번짐을 동시에 일으킨다. 먼저 형광펜은 잉크를 많이 쏟는 도구다. 넓은 칩으로 면을 칠하는 구조라 필기구 중에서도 단위 면적당 잉크 방출량이 가장 많은 축인데, 수성 잉크가 이 정도 양으로 들어오면 사전지 같은 저평량 종이는 그냥 뚫려버린다. 이게 번짐이다. 둘째, 어찌어찌 뚫리는 건 면했다 해도 형광색은 빛을 재방출하는 색이라 존재감이 워낙 강해서, 종이의 낮은 불투명도를 뚫고 뒷면에서 훤히 비쳐버린다. 이건 비침이다. 두 사건의 원인이 다르니 대
책상 위에 물을 쏟았다. 수습하고 보니 피해가 이상하게 편파적이었다. 다이어리의 볼펜 글씨는 멀쩡한데, 만년필로 쓴 페이지는 파랗게 번져서 졸지에 수채화가 되어 있었다. 같은 잉크라는 이름을 쓰는데 왜 하나는 버티고 하나는 흘러내리는가. 새벽까지 잉크 조성 자료를 읽고 나서야 알게 됐다. 물 쏟은 날 밤에 할 일치고는 좀 뜬금없었지만, 잉크의 세계는 색이 아니라 색을 붙잡아두는 방식으로 나뉜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히 건졌다.
염료 잉크, 색이 물에 녹아 있다
만년필 잉크의 기본값은 염료 잉크다. 색 분자가 물에 완전히 녹아든 상태로, 설탕물처럼 입자가 없는 균일한 용액이다. 이 구조의 장점은 만년필이라는 기계와의 궁합이다. 입자가 없으니 가느다란 잉크 길을 막을 일이 없고, 발색이 맑고 선명하며, 색 배합이 자유로워서 잉크 색 놀이의 대부분이 여기서 일어난다.
대가는 명확하다. 물에 녹아 있던 색은 물을 다시 만나면 도로 녹아버린다. 내 다이어리에서 벌어진 일이 정확히 이것이다
만년필에 입문하겠다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질문은 단 한 줄이었다. EF랑 F 중에 뭐 사. 간단히 답해주려고 표기 체계를 확인하다가, 간단히 답할 수 없는 세계라는 걸 알게 됐다. 닙 굵기 표기는 국제 규격이 아니었다. 같은 F가 브랜드에 따라 다른 굵기를 가리키고 있었고, 결국 친구에게 답장을 보낸 건 그날 밤 늦게였다. 친구의 반응은 "그냥 아무거나 살걸"이었지만, 이 글은 그 답장을 정리한 것이다.
닙 표기는 약속이 아니라 관례다
EF, F, M, B라는 표기는 ISO 같은 표준이 정한 수치가 아니다. 각 제조사가 자기 기준으로 붙이는 상대적인 등급일 뿐이다. 그래서 "F 닙 = 몇 mm"라는 절대 환산표는 존재하지 않고, 공개된 브랜드별 자료를 모으면 같은 F라도 선폭이 대략 0.1mm 이상 벌어진다. 볼펜의 0.5mm 표기가 볼 지름이라는 물리량을 가리키는 것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지점이다. 만년필의 세계는 숫자 대신 문자를, 규격 대신 관례를 쓴다.
일본 닙과
서랍을 정리하다가 볼펜을 아홉 자루 발견했다. 시필을 해보니 네 자루가 안 나왔다. 버리려고 모아 쥐는데 손이 멈췄다. 잉크가 절반 넘게 남은 게 훤히 보이는데, 이것들은 대체 왜 침묵하는가. 버리는 일은 자연스럽게 미뤄졌고, 굳은 볼펜의 사인을 규명하는 일이 대신 시작됐다. 이런 식으로 청소가 조사로 바뀌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굳는 경로는 하나가 아니다
공개 자료를 종합하면 안 나오는 볼펜의 사인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용제의 증발이다. 유성 잉크는 염료를 알코올 계열 용제에 녹인 것인데, 펜 끝 볼과 소켓 사이의 미세한 틈으로 용제가 아주 천천히 달아난다. 용제가 줄면 잉크 점도가 계속 올라가다가 결국 볼이 구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뚜껑을 잃어버린 펜이 먼저 가는 이유가 여기 있다.
두 번째는 팁 표면의 건조 피막이다. 볼에 묻은 채 공기와 만난 잉크가 말라붙어서 마개 역할을 해버린다. 속은 멀쩡한데 입구만 막힌 상태라, 살릴 가능성이 가장 높은
회사 비품함에서 연필을 하나 집었다. 몸통에 HB라고 적혀 있었다. 그 순간 이상한 기억이 따라왔다. 초등학생 때는 다들 2B를 쓰라고 했는데, 어른의 연필은 왜 HB일까. 연필을 깎다 말고 경도 기호의 족보를 검색하기 시작했고, 알고 보니 이 알파벳들은 등급이 아니라 배합비의 암호였다. 당신이 어릴 때 쥐었던 2B에도, 지금 책상의 HB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H와 B는 레시피다
연필심은 흑연 가루와 점토를 반죽해서 굽는다. 이 배합비가 경도의 전부다. 점토가 많아질수록 심이 단단해지고(H, hard) 글씨는 연해진다. 흑연이 많아질수록 심이 무르고(B, black) 글씨는 진해진다. HB는 그 중간, F는 HB와 H 사이에 낀 미묘한 존재다. 4H에서 2H, H, F, HB, B, 2B, 4B로 갈수록 점토의 자리에 흑연이 들어서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진하기와 단단함은 별개의 두 성질이 아니라 하나의 배합비가 만드는 양면이다. 진한 연필은 반드시
다이어리를 사흘 밀리고 몰아 쓰는 밤이었다. 손에 잡히는 볼펜으로 첫 줄을 썼는데 종이를 긁는 느낌이 거슬려서 다른 펜으로 바꿨더니, 이번에는 미끄러지듯 나갔다. 둘 다 촉은 0.5mm였다. 같은 규격인데 경험이 다르다면 규격이 말해주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고, 그런 걸 발견하면 이 책상에서는 하던 일이 멈춘다. 밀린 일기는 결국 다음 날로 넘어갔다. 우선순위가 이상하다는 자각은 있는데, 고칠 생각은 별로 없다.
0.5mm라는 숫자가 말해주지 않는 것
펜 포장의 0.5mm는 볼의 지름, 정확히는 선폭 규격이다. 필기감에 대한 정보가 아니다. 그 바깥에서 필기감을 쥐고 흔드는 변인이 있으니, 공개된 자료를 종합하면 대부분 잉크의 점도다.
점도, 자릿수가 다르다
제조사들이 공개한 스펙을 한 표에 모았다. 결국 스프레드시트를 열었다는 뜻이고, 여기까지 오면 이 조사는 끝을 보게 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숫자의 크기가 아니라 단위였다. 유성 잉크와 젤 잉크는 점도가 몇 배
필통을 열었더니 지우개가 자에 눌어붙어 있었다. 떼어내니 자 표면이 뿌옇게 녹아 있다. 지우개가 옆에 있던 문구를 공격하는 이 현상, 한 번쯤 겪어봤을 것이다. 범인을 찾다 보니 질문이 하나 앞서 나왔다. 애초에 지우개는 어떻게 연필 자국을 지우는 걸까. 갈아내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살았는데, 알아보니 절반만 맞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이 훨씬 재미있다.
연필 자국은 스며들지 않는다
먼저 연필 쪽 사정부터. 연필로 쓴 자국은 잉크처럼 종이에 스며든 것이 아니다. 흑연 입자가 종이 표면의 섬유 사이에 얹혀 있을 뿐이다. 볼펜 글씨는 잉크가 섬유 속으로 파고들어서 지우개로는 어쩔 도리가 없지만, 연필 글씨는 표면에 붙어 있는 상태라 떼어낼 수 있다. 지울 수 있는 필기구와 없는 필기구의 운명이 여기서 갈린다.
지우개는 갈아내지 않는다, 빼앗는다
지우개가 하는 일의 핵심은 접착력 경쟁이다. 지우개 표면은 흑연 입자를 붙잡는 힘이 종이 섬유보다 세다. 그래서 문지르
책장을 정리하다가 7년 전 수험서를 펼쳤다. 이상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볼펜 밑줄은 멀쩡한데 형광펜 자국만 유령처럼 옅어져 있는 것이다. 같은 페이지에서 하나는 살아남고 하나는 증발했다면, 두 잉크는 애초에 다른 원리로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 책 정리는 그 자리에서 중단됐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하던 일이 멈추는 체질이라 어쩔 수 없다.
미리 말해두면, 형광펜이 눈에 띄는 이유와 형광펜이 사라지는 이유는 같은 원리에서 나온다. 이 글은 그 원리 하나를 따라가는 이야기다.
형광은 반사가 아니라 재방출이다
일반 잉크의 색은 뺄셈으로 만들어진다. 종이에 닿은 빛 가운데 일부 파장을 흡수하고 나머지를 돌려보내는 방식이라, 빨간 잉크는 빨강 이외의 빛을 삼켜서 빨갛게 보인다. 당연히 들어온 빛보다 많은 빛이 나갈 수는 없다.
형광 염료는 여기에 덧셈을 얹는다.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자외선을 흡수한 뒤, 그 에너지를 눈에 보이는 파장으로 바꿔서 다시 내보내는 것이다. 주변 종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