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통을 열었더니 지우개가 자에 눌어붙어 있었다. 떼어내니 자 표면이 뿌옇게 녹아 있다. 지우개가 옆에 있던 문구를 공격하는 이 현상, 한 번쯤 겪어봤을 것이다. 범인을 찾다 보니 질문이 하나 앞서 나왔다. 애초에 지우개는 어떻게 연필 자국을 지우는 걸까. 갈아내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살았는데, 알아보니 절반만 맞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이 훨씬 재미있다.
연필 자국은 스며들지 않는다
먼저 연필 쪽 사정부터. 연필로 쓴 자국은 잉크처럼 종이에 스며든 것이 아니다. 흑연 입자가 종이 표면의 섬유 사이에 얹혀 있을 뿐이다. 볼펜 글씨는 잉크가 섬유 속으로 파고들어서 지우개로는 어쩔 도리가 없지만, 연필 글씨는 표면에 붙어 있는 상태라 떼어낼 수 있다. 지울 수 있는 필기구와 없는 필기구의 운명이 여기서 갈린다.
지우개는 갈아내지 않는다, 빼앗는다
지우개가 하는 일의 핵심은 접착력 경쟁이다. 지우개 표면은 흑연 입자를 붙잡는 힘이 종이 섬유보다 세다. 그래서 문지르면 흑연이 더 세게 끌어당기는 쪽, 그러니까 지우개 쪽으로 옮겨 붙는다. 흑연을 머금은 지우개 표면은 마찰에 밀려 떨어져 나간다. 지우개 가루, 우리가 지우개 똥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흑연을 감싸 안고 퇴장하는 운반체였던 것이다. 가루 없는 지우개가 있다면 빼앗은 흑연을 도로 종이에 문지르는 꼴이 되니, 가루는 부산물이 아니라 설계의 일부인 셈이다. 그동안 귀찮아하기만 해서 조금 미안해졌다.
공개 자료를 종합하면 지우개의 성능은 문지르는 힘이 아니라 표면의 화학에 달려 있다. 흑연을 얼마나 잘 붙잡는가, 그리고 얼마나 잘게 떨어져 나가는가.

플라스틱 지우개와 고무 지우개
문구점 지우개의 대부분은 이름과 달리 고무가 아니라 PVC 계열 플라스틱이다. PVC에 가소제를 섞어 말랑하게 만든 물건으로, 흑연 흡착이 좋고 가루가 깔끔하게 뭉친다. 전통적인 천연고무 지우개는 접착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서 흑연을 빼앗기보다 종이 표면을 살짝 갈아내는 쪽에 가깝다. 종이가 상하기 쉽고 자국도 덜 깨끗하게 지워진다. 현대 지우개의 표준이 PVC로 넘어온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필통 사건의 범인이 드러난다. PVC를 말랑하게 만들어 주던 가소제는 세월이 지나면 밖으로 배어 나오는데, 이것이 옆에 있는 플라스틱 자, 필통, 펜 몸통을 녹인다. 지우개가 부드러울수록 가소제가 많고, 가소제가 많을수록 잘 지워지지만 이웃을 침식할 확률도 올라간다. 부드러움은 공짜가 아니었다. 지우개 하나 고르는데 가소제 함량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원래 이 책상의 조사는 늘 이런 식으로 깊어진다.
모래지우개라는 예외
볼펜용이라고 파는 모래지우개는 원리가 다르다. 연마재가 들어 있어서 잉크가 스며든 종이 표면째 갈아낸다. 접착력 경쟁이 아니라 진짜 갈아내기다. 당연히 종이가 얇아지고, 열심히 하면 구멍이 난다. 잉크를 지운다기보다 잉크가 있던 자리를 제거하는 도구라고 부르는 편이 정확하다.
그래서 어떤 지우개를 고르나
원리를 알면 기준이 나온다. 연필 필기와 스케치가 많다면 부드러운 PVC 지우개가 맞다. 대신 자·필통과는 따로 재우고, 종이 슬리브를 끝까지 입혀둘 것. 가소제 문제를 아예 피하고 싶으면 가소제 프리 표기를 확인하면 된다. 제도처럼 정밀한 수정이 잦다면 단단한 쪽이 오히려 정확하고, 볼펜 글씨를 지울 일이 많은 사람이라면 답은 지우개 매대가 아니라 수정테이프 매대에 있다. 그 매대 이야기는 따로 한 편을 쓸 예정이다.
한 가지는 오늘부터 바로 써먹을 수 있다. 지우개는 접착력으로 일하니, 세게 문지르는 습관은 종이만 상하게 할 뿐 이득이 없다. 살살, 여러 번. 지우개의 화학을 믿어주면 된다. 자와 지우개를 한 칸에 재운 과거의 나에게도 이 글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