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얇은 사전에 형광 줄을 그었더니 뒷장의 단어 세 개가 노란 배경을 얻어버렸다. 앞장을 강조했는데 뒷장이 멋대로 편집된 것이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 이야기는 아니다. 빌린 책에 형광펜을 긋는 건 그 자체로 범죄니까.)
얇은 종이에서 형광펜이 사고를 내는 원인은 두 가지다. 잉크가 종이를 뚫고 스며드는 번짐, 그리고 색이 뒷면까지 보이는 비침. 이 글은 그 원인을 정리하고, 뒷면을 지키는 대안 세 가지(고체 형광펜, 파스텔 형광펜, 드라이 하이라이터)를 스펙 기준으로 비교한다.
형광펜이 뒷면까지 비치는 이유
형광펜이 뒷면을 망치는 경로는 두 갈래다. 첫째, 형광펜은 잉크를 많이 쏟는 도구다. 넓은 칩으로 면을 칠하는 구조라 필기구 중에서도 단위 면적당 잉크 방출량이 가장 많은 축인데, 수성 잉크가 이 정도 양으로 들어오면 사전지 같은 얇은 종이는 그냥 뚫려버린다. 이게 번짐이다. 둘째, 용케 안 뚫려도 문제가 남는다. 형광색은 빛을 더해 내보내는 색이라 존재감이 워낙 강해서, 얇은 종이의 낮은 불투명도를 뚫고 뒷면에서 훤히 비친다. 이게 비침이다. (번짐과 비침이 서로 다른 현상이라는 것은 노트 평량(gsm)과 비침 글에서 자세히 다뤘다.)
원인이 다르니 대안도 두 갈래로 갈린다. 잉크량을 줄이는 쪽과 색의 세기를 줄이는 쪽이다.
대안 1, 고체 형광펜(하이라이터 스틱)
고체 형광펜은 잉크를 아예 쓰지 않아서 번짐이 원천적으로 없다. 크레용처럼 왁스나 젤 스틱을 문질러 바르는 방식이라, 색이 종이 표면에 얹힐 뿐 스며들지 않는다.
건조 시간도 없어서 긋자마자 손으로 문질러도 안전하고, 얇은 종이가 우는 현상도 생기지 않는다. 공개된 사용 리포트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약점은 정밀도다. 스틱 단면이 뭉툭해서 한 줄만 깔끔하게 긋는 데는 오히려 손이 더 간다. 굵은 문단 강조에는 최적이고, 한 단어를 콕 집어 강조하는 데는 차선이다.

대안 2, 연한 색·파스텔 형광펜
파스텔 형광펜은 색의 세기를 낮춰서 비침을 줄인다. 형광 염료의 농도가 낮아 내보내는 빛 자체가 적으니, 같은 양이 뒷면에 도달해도 존재감이 옅다.
눈이 편하다는 부수 효과도 있어서 장시간 학습용으로 선호되는데, 대가도 명확하다. 형광펜의 존재 이유인 튀는 강조가 그만큼 약해지는 것이다. 페이지를 훑을 때 시선을 잡아채는 힘은 아무래도 원색 형광에 못 미친다.
대안 3, 드라이 하이라이터(색연필형)
드라이 하이라이터는 색연필처럼 마른 심으로 긋는 도구라, 스며들 잉크 자체가 없다. 색연필 심을 굵게 만든 형태로, 흑연 대신 색 안료 심을 종이에 문지르는 원리다. 연필과 같은 방식이라 침투가 아예 없고, 심을 깎아서 정밀도까지 조절할 수 있다.
지우개로 어느 정도 지워지는 제품도 있어서 빌린 책이나 중고로 팔 책에 쓰는 용도로 통용된다. 약점은 채도와 균일함이다. 넓은 면을 고르게 칠하기 어렵고, 색도 액체 형광에 비하면 탁한 편이다.
얇은 종이에 맞는 형광펜 고르는 법
기준을 종이 쪽에 두면 선택이 간단해진다. 사전, 성경책, 문고본처럼 얇은 종이라면 고체 형광펜이나 드라이 하이라이터가 정답에 가깝고, 일반 노트나 프린트물이라면 액체 형광펜이 여전히 낫다.
액체 형광펜은 아무리 살살 그어도 결국 잉크량의 문제라서 손기술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일반 종이에서는 액체 형광이 효율과 시인성 모두에서 앞서고, 뒷면까지 쓸 계획이 있을 때만 파스텔로 한 발 물러서면 된다. 그리고 애초에 강조가 목적이라면 형광이 유일한 답도 아니다. 얇은 종이에서는 연필 밑줄과 여백 기호가, 스며들 것도 없고 비용도 없는 대안으로 조용히 최강이다.
사전의 노란 뒷장은 되돌릴 수 없어서, 그 페이지에 "형광펜 침투 실험 기념"이라고 각주를 하나 달아뒀다. 사고를 데이터로 바꾸는 것, 이게 이 책상의 유일한 회계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