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을 정리하다가 볼펜을 아홉 자루 발견했다. 시필을 해보니 네 자루가 안 나왔다. 버리려고 모아 쥐는데 손이 멈췄다. 잉크가 절반 넘게 남은 게 훤히 보이는데, 이것들은 대체 왜 침묵하는가. 버리는 일은 자연스럽게 미뤄졌고, 굳은 볼펜의 사인을 규명하는 일이 대신 시작됐다. 이런 식으로 청소가 조사로 바뀌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굳는 경로는 하나가 아니다

공개 자료를 종합하면 안 나오는 볼펜의 사인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용제의 증발이다. 유성 잉크는 염료를 알코올 계열 용제에 녹인 것인데, 펜 끝 볼과 소켓 사이의 미세한 틈으로 용제가 아주 천천히 달아난다. 용제가 줄면 잉크 점도가 계속 올라가다가 결국 볼이 구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뚜껑을 잃어버린 펜이 먼저 가는 이유가 여기 있다.

두 번째는 팁 표면의 건조 피막이다. 볼에 묻은 채 공기와 만난 잉크가 말라붙어서 마개 역할을 해버린다. 속은 멀쩡한데 입구만 막힌 상태라, 살릴 가능성이 가장 높은 유형이다.

세 번째는 잉크 역류와 공기층이다. 펜을 위로 향하게 꽂아두면 중력이 잉크를 뒤로 당기고, 그 틈으로 공기가 들어와 잉크 기둥이 끊긴다. 이 경우는 잉크가 굳지 않았는데도 그저 볼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볼펜 팁에서 잉크가 굳는 세 가지 경로 모식도
볼펜 잉크가 굳는 경로 모식도

젤펜은 더 빨리, 더 확실히 죽는다

젤 잉크는 물 기반이다. 물은 유성 용제보다 훨씬 빨리 증발하니, 같은 방치 조건에서 젤펜이 먼저 굳는다. 그리고 한번 수분이 날아간 젤은 되돌리기가 어렵다. 젤펜 글에서 다룬 점도 이야기의 연장인데, 유성의 높은 점도는 알고 보면 증발 속도까지 늦춰주는 방패였던 셈이다. 노크식 볼펜이 유성 잉크에서 먼저 보편화된 것도 같은 이유로 설명이 된다. 노크식 젤펜은 팁을 밀폐하는 장치가 따로 필요했고, 그게 완성되기 전까지 젤펜은 오래도록 뚜껑을 고집했다.

다이어리에 펜으로 메모하는 손과 커피 한 잔
아침 다이어리, 볼펜이 순순히 나와줘야 하는 순간

살리는 법, 사인별 처방

사인이 다르니 처방도 다르다. 피막형은 이면지에 원을 그리며 마찰열로 피막을 갈아내는 고전적인 방법이 실제로 통한다. 증발형은 팁을 따뜻한 물에 잠깐 담가 점도를 낮추면 다시 나오는 경우가 있다. 다만 끓는 물이나 라이터 불은 몸통을 변형시키니 제외해야 한다. 역류형은 잉크를 앞으로 보내면 그만이다. 팁을 아래로 향하게 두거나, 펜을 양말 속에 넣고 원심력으로 몇 번 휘두르는 방법이 통용된다. 어느 쪽인지 확신이 안 서면 원 그리기, 미지근한 물, 원심력의 순서로 시도해 보는 게 합리적이다.

예방은 세 가지면 된다

굳은 뒤의 처방보다 확실한 건 예방이다. 캡은 닫는다. 팁이 아래로 가거나 눕도록 보관한다. 꽂아두는 연필통은 볼펜 입장에서는 사실 불리한 구조다. 그리고 차 안처럼 뜨거운 환경을 피한다. 열은 증발을 가속한다. 전부 잉크의 증발과 중력이라는 두 변수를 관리하는 일일 뿐이다.

하나 더 적어두자면, 볼펜에도 사실상의 유통기한이 있다. 제조사들은 대체로 미개봉 기준 2~3년 안팎을 권장 사용 기간으로 안내한다. 밀봉 상태에서도 증발이 완전히 멈추지는 않기 때문이다. 리필심을 쟁여두는 습관이 있다면 대량 구매가 오히려 손해일 수 있다는 뜻인데, 이건 순전히 내 얘기다. 잉크는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살릴 펜과 보낼 펜

마지막은 효율 계산이다. 몇백 원짜리 볼펜을 십 분 들여 살리는 건 손익으로 보면 적자다. 그럼에도 시도할 가치가 있는 경우는 있다. 리필심이 단종됐거나 비싼 펜, 그리고 몸통에 애착이 있는 펜이 그렇다. 반대로 굳은 채 일 년 넘게 서랍에 있던 저가 볼펜은 보내주는 쪽이 서로에게 낫다. 나는 네 자루 중 두 자루를 원 그리기로 살렸고, 한 자루는 물에 담가 살렸고, 마지막 한 자루는 보냈다. 승률 75퍼센트. 서랍 정리는 또 미뤄졌지만 데이터는 남았으니, 이 정도면 남는 장사라고 우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