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비품함에서 연필을 하나 집었다. 몸통에 HB라고 적혀 있었다. 그 순간 이상한 기억이 따라왔다. 초등학생 때는 다들 2B를 쓰라고 했는데, 어른의 연필은 왜 HB일까. 연필을 깎다 말고 경도 기호의 족보를 검색하기 시작했고, 알고 보니 이 알파벳들은 등급이 아니라 배합비의 암호였다. 당신이 어릴 때 쥐었던 2B에도, 지금 책상의 HB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H와 B는 레시피다
연필심은 흑연 가루와 점토를 반죽해서 굽는다. 이 배합비가 경도의 전부다. 점토가 많아질수록 심이 단단해지고(H, hard) 글씨는 연해진다. 흑연이 많아질수록 심이 무르고(B, black) 글씨는 진해진다. HB는 그 중간, F는 HB와 H 사이에 낀 미묘한 존재다. 4H에서 2H, H, F, HB, B, 2B, 4B로 갈수록 점토의 자리에 흑연이 들어서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진하기와 단단함은 별개의 두 성질이 아니라 하나의 배합비가 만드는 양면이다. 진한 연필은 반드시 무르고, 단단한 연필은 반드시 연하다. "진하면서 안 닳는 연필"은 원리상 존재할 수 없다. 젤펜 글에서 본 점도처럼, 장점과 단점이 같은 뿌리에서 자라는 사례가 여기에도 있다. 문구의 세계는 이런 식으로 자꾸 공평하다.

왜 어린이에게는 2B였나
초등학교의 2B 권장은 관습이 아니라 역학이다. 필압이 약한 어린이가 HB로 쓰면 글씨가 연해서 획 연습에 불리하다. 무른 2B는 약한 힘으로도 진한 선을 내준다. 반대로 필압이 자리 잡은 어른이 2B를 쓰면 심이 빨리 닳고 손날에 흑연이 묻고, 노트 맞은편 페이지에 글씨가 번들번들 전사된다. 어른의 연필이 HB로 수렴한 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평균 필압에 맞춘 최적화였던 셈이다.
같은 논리로 OMR 답안지의 "컴퓨터용 연필"이 B 계열인 것도 설명이 된다. 광학 판독기는 마킹의 반사율을 읽는데, 흑연이 많은 B 계열이 더 검고 균일한 마킹을 만든다. 시험장의 지정 연필에도 배합비의 사정이 있었다.
미국 연필의 #2는 무엇인가
미국식 연필에는 숫자가 적혀 있다. #2가 대략 HB에 대응하고, #1은 더 무르고 #3은 더 단단하다. 같은 물성을 두 기호 체계가 다르게 부를 뿐이라, 해외 문구를 살 때는 #2 = HB 하나만 기억하면 대부분 해결된다. 다만 브랜드끼리 HB가 정확히 같은 진하기라는 보장은 없다. 경도 표기는 국제 표준이 아니라 관례라서, A사의 HB와 B사의 HB는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이 통용되는 상식이다. 문구의 세계에서 표기란 약속이라기보다 방언에 가깝다.
용도별 자리
배합비에서 용도가 나온다. 일반 필기는 HB에서 B 사이, 진하기와 내구성의 중간 지대다. 스케치와 드로잉은 2B에서 4B, 음영과 부드러운 선을 얻는 대신 자주 깎는 수고를 치른다. 제도와 설계는 H 계열로, 선이 연한 대신 굵기가 오래 일정하게 유지된다. 진하게 쓴 연필일수록 지울 때 유리하다는 부수 효과도 있다. 흑연이 종이 표면에 얹혀 있는 양이 많아서인데, 이 "얹혀 있는" 구조가 궁금하다면 지우개 글에 자세히 적어뒀다.
결론은 손에 달렸다. 필압이 센 편이면 HB보다 F나 H 쪽이 오히려 깔끔하고, 필압이 약하거나 연필 특유의 진한 질감이 좋다면 B 쪽이 맞다. 어른에게 2B는 대체로 과하다. 어린 시절의 권장을 관성으로 따라 살 이유는 없는 것이다. 비품함의 HB 연필은 결국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배합비를 알고 나니 내 필압에는 F가 맞겠다는 계산이 나와버렸기 때문인데, 연필 한 자루 집었다가 취향이 하나 갱신됐으니 비품함 앞에서는 수지맞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