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통을 정리하다가 같은 모델의 볼펜이 세 자루라는 걸 발견했다. 잉크가 다 되면 리필심 대신 매번 새 펜을 샀던 흔적이다. 리필이 있는 줄 몰랐던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본체를 샀을까. 게으름이라고 결론 내리기 전에, 그 게으름이 실제로 얼마짜리인지 한번 계산해 보기로 했다. 결과는 예상과 조금 달랐다. 답은 펜에 따라 다르다였고, 그 갈림길이 이 글의 주제다.

가격 구조가 두 종류다

시중 가격들을 모아 스프레드시트에 정리해 보니, 펜의 세계는 리필 관점에서 두 부류로 나뉜다는 게 보였다. 저가 펜은 본체 가격과 리필심 가격이 거의 붙어 있다. 본체가 천 원인데 리필이 칠팔백 원인 식이다. 이 구간에서 리필은 경제 행위가 아니라 그냥 취향의 문제다. 그립이 길든 몸통에 정이 들었든, 돈으로는 딱히 정당화가 안 된다. 중가 이상의 펜은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본체는 만 원인데 리필은 이삼천 원처럼 리필이 본체의 몇 분의 일 가격이 되면서, 몇 번만 리필해도 본체 값을 회수하는 산수가 성립한다. 컨버터의 손익분기와 같은 프레임인데, 여기서는 초기 투자가 곧 좋은 본체를 사는 일인 셈이다.

본체 재구매와 리필 사용의 누적 비용 비교 모식도
본체 재구매 vs 리필의 누적 비용 모식도

함정, 리필에도 족보가 있다

산수가 성립해도 전제가 하나 붙는다. 리필을 계속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리필 규격은 문구계의 다른 규격들처럼 표준과 관례가 뒤섞여 있다. 여러 브랜드가 공용하는 통용 규격이 있는가 하면, 그 브랜드의 그 라인에서만 쓰는 전용 규격도 흔하다. 통용 규격 펜은 본체가 단종돼도 리필 생태계가 계속 살아 있지만, 전용 규격 펜은 리필 단종이 곧 펜의 사망 선고가 된다. 본체에 정착할 생각이라면 결제 전에 이 리필이 다른 데서도 팔리는지 확인하는 게 좋은 보험이다. 확인법은 어렵지 않다. 이미 가진 펜이라면 분해해서 심에 각인된 규격 문자를 읽으면 되고, 구매 전이라면 모델명과 리필을 함께 검색해 타사 호환품이 섞여 나오는지 보면 생태계의 크기가 대충 짐작된다.

분해된 볼펜 부품들과 리필심
리필심, 정착이라는 경제학의 재료들

게으름의 값, 그리고 숨은 비용

내 세 자루 사건의 회계를 마저 해보자. 저가 펜이었으니 금전 손실은 몇백 원 단위에 불과했다. 그런데 계산하다 보니 더 큰 비용이 하나 드러났다. 본체 방랑이다. 리필 없이 새 펜을 살 때마다 조금씩 다른 모델을 집으면서, 손에 맞는 그립을 찾는 적응 비용을 매번 다시 지불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기구의 진짜 경제학은 심 값이 아니라 손에 맞는 도구에 정착해서 그 탐색을 끝내는 데 있다는 게 이번 계산의 뜻밖의 수확이었다. 환경 비용도 한 줄 적어둔다. 리필은 버려지는 플라스틱을 심 하나 분량으로 줄여준다. 금액으로는 안 잡히지만 분명 0은 아니다.

세 갈래로 나뉜다

정리하면 세 갈래다. 천 원대 펜을 쓰고 있다면 리필은 그냥 잊어도 된다. 대신 같은 모델을 계속 사는 것으로 방랑 비용만 막으면 된다. 만 원대 이상의 본체가 손에 맞는다면 리필 규격부터 확인하고 정착할 것. 리필 서너 번이면 투자 회수가 끝나고 그 뒤는 전부 이익 구간이다. 그리고 어느 구간이든, 잉크가 닳기도 전에 새 펜에 자꾸 눈이 가는 사람이라면, 문구 블로그 독자층에게 흔한 직업병이다, 경제성 계산은 애초에 무의미하다. 그건 소모품 구매가 아니라 취미 활동이고, 취미의 회계는 원래 다른 장부에 적는 법이다.

세 자루 중 두 자루는 서랍의 예비 보직으로 보냈고, 한 자루에는 처음으로 리필심을 끼워줬다. 네 번째 본체는 없을 예정이다. 장부에 그렇게 적어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