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에서 만년필을 꺼냈다가 조용히 다시 넣었다. 회사 복사지 위에서 내 글씨가 수염 난 얼룩으로 변하는 걸 봤기 때문이다. 같은 펜이 집의 노트에서는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게 구르는데, 종이가 바뀌자 완전히 다른 도구가 되어버렸다. 만년필은 왜 이렇게 종이를 가리는가. 그동안 이 블로그에서 조각조각 다뤄온 이야기들이 사실 하나의 지도로 모인다는 걸 깨달았고, 오늘은 그 지도를 그려본다.

전제, 만년필은 잉크를 쏟아붓는 도구다

출발점은 잉크 방출량이다. 볼펜의 유성 잉크가 고점도 잉크를 볼로 조금씩 굴려 바르는 방식이라면, 만년필은 저점도 수성 잉크를 모세관 현상으로 흘려보내는 방식이다. 단위 길이당 종이에 도달하는 액체의 양이 필기구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라, 볼펜이 아무 종이에서나 무난한 반면 만년필은 종이의 모든 약점을 사정없이 들춰낸다. 종이를 가리는 게 아니라, 종이의 실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세 가지 참사, 원인을 나눠 본다

복사지 위의 참사를 분해하면 사실 세 현상이 겹쳐 있다. 첫째는 페더링이다. 잉크가 종이 섬유를 모세관 삼아 타고 나가면서 획 가장자리에 수염 같은 잔가지가 생기는 현상으로, 표면 사이징이 약해 섬유가 그대로 드러난 종이에서 일어난다. 둘째는 번짐이다. 잉크가 두께 방향으로 관통해 뒷면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셋째는 비침인데, 관통 없이도 낮은 불투명도 때문에 뒷면에서 어른거리는 현상이다. 뒤의 둘은 평량 글에서 이미 갈라놓은 구분이고, 페더링은 만년필에서만 유독 도드라지는 세 번째 축이다.

만년필 잉크의 페더링 현상 확대 모식도
페더링, 잉크가 섬유를 타고 번지는 구조 모식도

원인이 갈리니 처방도 자연히 갈린다. 페더링과 번짐은 사이징의 문제라 만년필 대응 종이로 해결되고, 비침은 불투명도의 문제라 종이를 두껍게 하거나 한 면만 쓰는 것으로 피해 간다. 이 셋을 뭉뚱그려 종이가 나쁘다고만 해버리면 다음 노트를 고를 때도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게 된다.

줄 노트 위에 글씨를 쓰고 있는 만년필 촉
만년필, 종이의 실력을 드러내는 도구

펜과 잉크 쪽에서 줄이는 법

종이를 못 바꾸는 상황, 그러니까 회사 복사지 같은 경우라면 방출량 쪽을 조이는 수밖에 없다. 닙은 가늘수록 잉크를 적게 흘리니 EF나 F가 복사지 생존율이 높고, 잉크도 변수가 된다. 같은 염료 잉크라도 표면장력과 건조 속도 설계에 따라 페더링 억제를 내세우는 제품군이 있고, 안료 잉크는 입자가 표면에 걸려서 상대적으로 덜 파고드는 경향이 통용 상식이다. 그래도 한계는 있다. 사이징 없는 종이 앞에서 잉크 튜닝은 어디까지나 감속이지 정지가 아니다.

확인은 한 방울이면 된다

노트를 사기 전 테스트가 가능하다면 방법은 소박하다. 구석에 점 하나를 찍고 10초쯤 지켜본다. 점이 또렷한 원으로 남으면 사이징이 제 몫을 하고 있는 것이고, 가장자리가 수염을 뻗기 시작하면 그 노트의 본성을 이미 확인한 셈이다. 스펙 표기로는 만년필 대응, 사이징, 그리고 만년필 사용자들 사이에서 정평이 통용되는 용지 이름들이 단서가 된다. 이름을 통째로 외우기보다 원리를 기억해 두는 쪽이 응용 범위가 훨씬 넓다.

포기하지 않고 쓰는 법

만년필을 종이 때문에 포기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건 도구와 환경의 궁합 문제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집이나 서재처럼 종이를 통제할 수 있는 곳이 만년필의 홈그라운드이고, 회사 서류나 공용 양식처럼 종이를 통제할 수 없는 곳에서는 가는 닙으로 버티거나 볼펜으로 갈아타는 것이 우아한 후퇴다. 어차피 기억에 남는 건 손으로 썼다는 사실 쪽이지, 어떤 촉으로 썼느냐가 아니다.

회의실 참사의 복사지는 스캔해서 페더링 표본 폴더에 조용히 넣어뒀다. 실패를 표본으로 바꾸면 그게 다음 글의 재료가 된다. 이 블로그는 대체로 이런 원가 구조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