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에 물을 쏟았다. 수습하고 보니 피해가 이상하게 편파적이었다. 다이어리의 볼펜 글씨는 멀쩡한데, 만년필로 쓴 페이지는 파랗게 번져서 졸지에 수채화가 되어 있었다. 같은 잉크라는 이름을 쓰는데 왜 하나는 버티고 하나는 흘러내리는가. 새벽까지 잉크 조성 자료를 읽고 나서야 알게 됐다. 물 쏟은 날 밤에 할 일치고는 좀 뜬금없었지만, 잉크의 세계는 색이 아니라 색을 붙잡아두는 방식으로 나뉜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히 건졌다.

염료 잉크, 색이 물에 녹아 있다

만년필 잉크의 기본값은 염료 잉크다. 색 분자가 물에 완전히 녹아든 상태로, 설탕물처럼 입자가 없는 균일한 용액이다. 이 구조의 장점은 만년필이라는 기계와의 궁합이다. 입자가 없으니 가느다란 잉크 길을 막을 일이 없고, 발색이 맑고 선명하며, 색 배합이 자유로워서 잉크 색 놀이의 대부분이 여기서 일어난다.

대가는 명확하다. 물에 녹아 있던 색은 물을 다시 만나면 도로 녹아버린다. 내 다이어리에서 벌어진 일이 정확히 이것이다. 빛에도 상대적으로 약해서 직사광 아래 오래 두면 바랜다. 형광펜이 빛에 지는 이야기와 같은 계열의 운명이다.

염료 잉크의 용해와 안료 잉크의 입자 분산 차이 모식도
염료(용해)와 안료(분산)의 구조 차이 모식도

안료 잉크, 색이 입자로 떠 있다

안료 잉크는 반대 전략을 쓴다. 물에 녹지 않는 색 입자를 곱게 갈아 분산시킨 것으로, 용액이라기보다 미세한 흙탕물에 가깝다. 입자가 종이 섬유에 물리적으로 박혀 정착하면 물이 와도 녹여낼 것이 없다. 내수성과 내광성이 염료와 비교가 안 되는 이유다. 서류나 서명, 오래 보관할 기록에 안료 잉크가 권장되는 근거이기도 하다. 수정액의 이산화티타늄도 사실 같은 원리로 일하는 백색 안료다.

대가도 정반대쪽에 있다. 입자는 가라앉고, 마르면 그대로 굳는다. 만년필에 안료 잉크를 넣고 오래 방치하면 잉크 길 어딘가에서 입자가 정착해버린다. 볼펜이 굳는 이야기의 만년필판인 셈인데, 복구 난도는 그보다 한층 높다. 안료 잉크를 쓰는 펜은 자주 쓰거나 자주 씻거나, 둘 중 하나는 약속해야 하는 것이다.

검은색 만년필 잉크병
잉크병, 염료와 안료 두 세계 중 하나

철갈 잉크, 산화로 눌러앉는 제3의 길

역사가 가장 긴 답도 있다. 철갈 잉크는 철 이온과 타닌산의 화학 반응으로 색을 만든다. 쓸 때는 옅다가 공기와 만나 산화하면서 점점 진해지고, 그 반응 산물이 종이에 화학적으로 결합해 수백 년을 버틴다. 중세 문서들이 오늘까지 읽히는 이유의 상당 부분이 여기 있다. 현대 철갈 잉크는 배합이 훨씬 순해졌지만, 산성이라는 점에서 펜을 부지런히 관리해야 한다는 조건은 여전히 남아 있다. 내구성의 끝판이 관리 부담의 끝판이기도 한 셈이다.

덧붙여 실무 경고를 하나 적어둔다. 골격이 다른 잉크를 한 펜 안에서 섞지 않는 것이 통용되는 원칙이다. 염료 용액에 안료 입자가, 혹은 산성 철갈에 중성 염료가 만나면 침전이나 응고가 일어날 수 있고, 그 결과물은 잉크 길 어딘가에 조용히 눌러앉는다. 잉크를 갈아탈 때는 물로 한번 헹구고 교체할 것. 지루한 한 단계지만, 이게 펜의 수명을 산다.

잉크는 용도의 언어다

정리하면 세 골격의 거래는 언제나 일관된다. 색과 흐름을 즐기고 싶다면 염료, 기록을 오래 살리고 싶다면 안료나 철갈, 관리가 편해야 한다면 다시 염료다. 그러니 잉크를 고르는 질문은 어느 색이 예쁜가보다 먼저 이 글씨가 물이나 시간과 만날 일이 있는가여야 한다. 일기나 필사처럼 실내에서 조용히 사는 기록이면 염료로 충분하고, 계약서나 주소 라벨, 아카이브라면 안료 쪽이 맞다. 두 세계를 오가야 한다면 잉크를 타협하기보다 펜을 나누는 편이 낫다.

물 쏟은 다이어리의 번진 페이지는 그냥 두기로 했다. 사고가 데이터로 남았다고 생각하면 기록으로서는 오히려 더 진실한 셈이다. 대신 그 옆에 안료 잉크로 한 줄을 더 적어뒀다. 이 줄은 다음 사고에서도 살아남는지 지켜보겠다고. 다음 실험 대상이 무엇이 될지는 아직 나도 모르지만, 아마 책상 위 어딘가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