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에 입문하겠다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질문은 단 한 줄이었다. EF랑 F 중에 뭐 사. 간단히 답해주려고 표기 체계를 확인하다가, 간단히 답할 수 없는 세계라는 걸 알게 됐다. 닙 굵기 표기는 국제 규격이 아니었다. 같은 F가 브랜드에 따라 다른 굵기를 가리키고 있었고, 결국 친구에게 답장을 보낸 건 그날 밤 늦게였다. 친구의 반응은 "그냥 아무거나 살걸"이었지만, 이 글은 그 답장을 정리한 것이다.

닙 표기는 약속이 아니라 관례다

EF, F, M, B라는 표기는 ISO 같은 표준이 정한 수치가 아니다. 각 제조사가 자기 기준으로 붙이는 상대적인 등급일 뿐이다. 그래서 "F 닙 = 몇 mm"라는 절대 환산표는 존재하지 않고, 공개된 브랜드별 자료를 모으면 같은 F라도 선폭이 대략 0.1mm 이상 벌어진다. 볼펜의 0.5mm 표기가 볼 지름이라는 물리량을 가리키는 것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지점이다. 만년필의 세계는 숫자 대신 문자를, 규격 대신 관례를 쓴다.

일본 닙과 서양 닙의 굵기 스케일 오프셋 모식도
닙 표기 스케일의 브랜드 간 오프셋 모식도

일본 닙과 서양 닙, 반 단계의 오프셋

관례에도 나름의 패턴은 있다. 통용되는 경험칙으로 일본 브랜드의 닙은 같은 표기의 서양 닙보다 대략 반 단계에서 한 단계 가늘다. 일본 F가 서양 EF에 가깝고, 일본 M이 서양 F 언저리라는 식이다. 이유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문자다. 한자와 가나처럼 획이 조밀한 문자를 쓰는 시장에서는 가는 선이 기본 수요였고, 그래서 스케일 전체가 가는 쪽으로 슬쩍 이동했다는 설명이다. 절대적인 법칙은 아니지만, 브랜드의 국적을 보고 표기를 한 번 보정해서 읽는 습관은 실패 확률을 확실히 줄여준다.

종이 위에 놓인 만년필 촉 클로즈업
만년필 닙, 표기는 결국 관례다

한글은 어느 쪽인가

한글도 조밀한 문자 쪽이다. 받침이 있는 글자는 좁은 세로 공간에 최대 일곱 개 안팎의 획을 쌓아 올린다. 굵은 닙으로 쓰면 획과 획 사이가 뭉개져서 '를'과 '틀'이 구분되기를 포기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노트 줄간격 글에서 한글이 세로 공간을 더 쓴다고 했는데, 닙에서는 같은 이유가 가는 선 선호로 나타나는 셈이다. 통용되는 권장도 이 방향을 가리킨다. 한글 위주 필기라면 일본 기준 F, 서양 기준 EF 언저리가 안전 지대다.

닙 굵기는 잉크와 종이의 곱이다

여기서 변수를 하나 더 얹어야 정확해진다. 실제 선폭은 닙 단독이 아니라 닙과 잉크 흐름과 종이가 함께 곱해진 결과다. 잉크가 잘 스며드는 종이에서는 같은 닙도 선이 퍼져서 반 단계쯤 굵어지고, 사이징이 좋은 종이에서는 표기 그대로 나온다. 잉크 흐름이 후한 펜이라면 또 반 단계가 더해진다. "EF를 샀는데 F처럼 나온다"는 흔한 후기 문장은 그러니 불량이 아니라 이 곱셈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스펙시트를 표로 만들면서 확신하게 된 건, 닙 표기 하나만으로 결과를 예측하는 일 자체가 애초에 무리라는 사실이었다.

첫 닙의 산수

그래서 친구에게 보낸 답은 결국 조건문이었다. 한글 필기가 주 용도면 일본 브랜드 F나 서양 브랜드 EF. 영문 서명이나 다이어리 제목처럼 큰 글씨 용도가 섞이면 F에서 M 사이. 수첩처럼 작은 칸에 쓴다면 무조건 가는 쪽. 그리고 어느 쪽이든 첫 펜에서 굵기가 애매하다고 느껴지면 다음 펜이 아니라 종이부터 바꿔볼 것. 닙보다 값싼 변수부터 통제하는 게 실험의 순서니까.

물론 굵은 닙이 정답인 사람도 있다. 필압 없이 부드럽게 쓰는 게 목적이거나 잉크의 농담을 즐기고 싶다면 M 이상이 맞다. 가는 닙은 잉크를 적게 흘려서 그 농담이 잘 안 보인다. 결국 닙 선택은 글씨 크기와 잉크 취향 사이 어딘가에 좌표를 찍는 일이다. 좌표를 모르고 사면 관례의 바다에서 표류하지만, 알고 사면 두 번째 펜부터는 오차 반 단계 안에서 맞아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