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를 사흘 밀리고 몰아 쓰는 밤이었다. 손에 잡히는 볼펜으로 첫 줄을 썼는데 종이를 긁는 느낌이 거슬려서 다른 펜으로 바꿨더니, 이번에는 미끄러지듯 나갔다. 둘 다 촉은 0.5mm였다. 같은 규격인데 경험이 다르다면 규격이 말해주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고, 그런 걸 발견하면 이 책상에서는 하던 일이 멈춘다. 밀린 일기는 결국 다음 날로 넘어갔다. 우선순위가 이상하다는 자각은 있는데, 고칠 생각은 별로 없다.
0.5mm라는 숫자가 말해주지 않는 것
펜 포장의 0.5mm는 볼의 지름, 정확히는 선폭 규격이다. 필기감에 대한 정보가 아니다. 그 바깥에서 필기감을 쥐고 흔드는 변인이 있으니, 공개된 자료를 종합하면 대부분 잉크의 점도다.
점도, 자릿수가 다르다
제조사들이 공개한 스펙을 한 표에 모았다. 결국 스프레드시트를 열었다는 뜻이고, 여기까지 오면 이 조사는 끝을 보게 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숫자의 크기가 아니라 단위였다. 유성 잉크와 젤 잉크는 점도가 몇 배 차이 나는 게 아니라 자릿수가 다르다. 꿀과 요구르트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대충 맞는다.
점도가 높으면 볼이 구를 때 저항이 커지고, 그 저항을 손끝은 긁힘과 무게감이라고 번역한다. 엄밀히 말하면 젤 잉크는 힘을 받는 순간 점도가 변하는 별난 유체라 이야기가 더 복잡하지만, 우리가 펜을 고르는 데 필요한 물리는 여기까지다. 젤펜이 부드러운 것은 첨단 기술이 아니라 물성의 결과에 가깝고, 광고 문구의 "부드러운 필기감"은 잉크 종류를 알려주는 힌트로 읽으면 된다.

그럼 저점도가 무조건 좋은가
그럴 리가. 점도가 낮을수록 잉크는 종이에 많이, 빨리 스며든다. 얇은 종이에서는 뒷비침이 늘고, 건조가 느린 조합에서는 손날에 잉크가 묻는다. 왼손으로 쓰는 사람이라면 이 단점부터 만난다. 반대로 유성의 높은 점도는 긁힘의 원인인 동시에 번짐 없는 보존성의 이유가 된다. 장점과 단점이 같은 뿌리에서 자라는 것이다. 우열이 아니라 자리바꿈이다.
중간이 있다, 저점도 유성이라는 절충
여기까지 정리하면 자연스러운 질문이 나온다. 유성의 보존성과 젤의 부드러움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나. 제조사들도 같은 질문을 했는지 2000년대 이후 "저점도 유성"이라 불리는 잉크 계열이 나왔다. 유성 잉크의 점도를 크게 낮춰 필기 저항을 줄이되, 물 기반인 젤과 달리 유성의 골격을 유지해서 번짐과 건조 문제를 피해 가는 접근이다. 마케팅은 부드러움을 앞세우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새 발명이라기보다 저울 위에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이 절충도 공짜는 아니다. 점도를 낮춘 유성은 필기선의 진하기가 고르지 않다는 지적이 꾸준하고(공개된 사용자 리포트 기준이다, 내가 재본 것은 아니고), 잉크 소모도 빠른 편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지점을 골라도 무언가를 내준다. 다만 이 사실을 알고 고르는 사람과 모르고 고르는 사람은 매대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다르다.
고르는 기준, 결국 손이 정한다
스펙 조사의 결론은 단순했다. 필기량이 많고 손에 힘이 들어가는 사람은 저점도 쪽이 피로가 덜하다. 필압이 낮고 종이를 가리지 않아야 하는 사람, 기록을 오래 남겨야 하는 사람에게는 유성이 맞다. 둘 사이에서 고민이 길어지면 저점도 유성 계열이 절충안이 된다. 펜을 고르기 전에 물어야 할 것은 "어느 펜이 좋은가"가 아니라 "내 손이 어떤 습관을 가졌는가"였던 것이다.
모두에게 맞는 펜이 없다는 결론은 실망스럽기보다 오히려 공평하게 느껴진다. 여기까지 오는 데 이틀이 걸렸다. 원래는 10분짜리 검색이었고, 밀린 다이어리는 여전히 밀려 있지만, 대신 나는 잉크 점도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됐다. 남는 장사인지는 아직 계산 중이다. 다음 궁금증은 이미 정해졌다.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 때, 종이 쪽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평량 이야기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