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록을 몰아 쓰던 날이었다. 마음이 급해서 손이 말을 앞질러 갔고, 페이지를 넘기려고 손날로 종이를 쓸었더니 방금 쓴 문장이 길게 번져 있었다. 파란 자국은 손날에도 묻어 있었다. 옆자리 동료의 메모는 멀쩡했다. 조건이 다른 것은 펜 하나뿐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차이는 잉크의 용매, 그러니까 색을 실어 나르는 액체가 기름이냐 물이냐에서 온다. 펜 포장에 적힌 유성·수성·중성이 바로 그 구분이다. 이 글은 세 잉크의 성분과 점도 차이를 비교하고, 번짐과 건조 속도와 필압을 기준으로 용도에 맞는 볼펜을 고르는 법까지 정리한다. 회의록은 그날 밤 다시 정리했다. 잉크 용매를 검색하다가 자정을 넘긴 것은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유성·중성·수성 잉크의 용매와 색재 구성을 나란히 놓은 3열 비교 모식도
세 잉크는 색을 실어 나르는 액체부터 다르다 (모식도)

유성 수성 중성 펜의 차이, 용매가 가른다

세 이름은 잉크의 용매 구분이다. 유성 잉크는 기름 계열 용매에 염료를 녹인 것이고, 수성 잉크는 물에 염료를 녹인 것이다. 중성 잉크는 물 기반이라는 점에서는 수성 쪽이지만, 안료와 겔화제(잉크를 젤리처럼 굳혀 두는 성분)를 섞어 성질을 유성과 수성의 중간으로 맞췄다. 그래서 이름이 중성이다. 산성·알칼리성 할 때의 그 중성이 아니라, 두 진영의 가운데라는 뜻의 관행적인 이름이다. 문구점에서 젤펜이라고 부르는 것과 중성펜은 같은 물건이다.

용매가 다르면 점도가 다르다. 유성 잉크는 되직하고, 수성 잉크는 물에 가깝게 묽다. 이 둘의 점도는 몇 배가 아니라 자릿수 단위로 벌어진다. 그 차이가 필기감을 어떻게 가르는지는 젤펜과 유성볼펜의 점도 이야기에서 따로 다뤘다. 이 글에서 기억할 것은 하나다. 용매가 정해지는 순간 번짐, 건조, 필압, 잉크 수명까지 줄줄이 따라 정해진다는 것.

세 잉크 스펙 비교: 점도, 건조, 내수성, 잉크 소모

제조사 안내와 공개 기술 자료를 한 표로 모으면 이렇게 정리된다. 표 하나로 끝나는 걸 알면서도 자료를 여섯 개쯤 교차 확인했다(이 습관은 고쳐지지 않고, 고칠 마음도 별로 없다).

항목 유성 중성(젤) 수성
용매 기름 계열 물 + 겔화제
색재 염료 주로 안료 주로 염료
점도 높다 중간, 쓸 때만 묽어짐 물에 가깝다
필압 필요하다 적게 든다 거의 안 든다
겉마름 속도 빠르다 중간 느리다
물에 강한가 강하다 안료면 강하다 약하다
잉크 소모 느리다 중간 빠르다
얇은 종이 뒷비침 적다 중간 많다

몇 줄은 부연이 필요하다. 수성 펜이 빨리 닳는 것은 결함이 아니라 구조다. 묽은 잉크는 볼이 구를 때마다 넉넉하게 흘러나오고, 종이에 깊고 넓게 스며든다. 진하고 또렷한 선의 대가로 잉크 통이 빨리 비고, 얇은 종이에서는 뒷면 비침이 먼저 인사를 한다. 반대로 유성 잉크는 적게 나와서 오래 쓰고, 종이 표면에 얹히듯 묻어서 뒷비침이 적다. 대신 볼 저항이 커서 손에 힘이 들어간다.

중성펜이 부드러우면서 안 번지는 이유

중성 잉크의 비밀은 점도가 고정값이 아니라는 데 있다. 가만히 있을 때는 되직하게 굳어 있다가, 볼이 구르며 힘을 받는 순간에만 묽어져서 흘러나온다. 이런 성질을 전단박화라고 부른다(케첩이 병 안에서는 버티다가 흔들면 쏟아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쓰는 순간에는 수성처럼 부드럽고, 종이 위에서는 다시 되직해져 수성만큼 깊이 번지지 않는다.

색재도 한몫한다. 중성 잉크는 염료 대신 안료를 쓰는 제품이 많다. 염료는 용매에 녹아 있어서 물이 닿으면 같이 풀려나가지만, 안료는 색 알갱이가 종이 섬유에 걸려 있는 구조라 물에 잘 버틴다. 염료와 안료의 차이는 만년필 잉크 성분 글에서 자세히 다뤘는데, 볼펜에서도 같은 물리가 작동한다. 다만 모든 중성펜이 안료인 것은 아니라서, 물에 강해야 하는 용도라면 포장의 내수성 표기를 확인하는 편이 안전하다.

같은 글씨에 물방울이 떨어졌을 때 유성·안료 젤·수성 잉크가 버티는 정도 차이 모식도
물에 강한 순서는 용매와 색재가 정한다 (모식도)

용도별 볼펜 고르는 법: 서명, 회의록, 공부

서류와 서명에는 유성이나 안료 중성펜을 쓴다. 계약서 글씨는 커피를 쏟아도, 십 년이 지나도 읽혀야 하는 글씨다. 물이 용매인 염료 수성 잉크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

빠르게 많이 쓰는 회의록과 강의 필기라면 수성이나 중성이 유리하다. 필압이 거의 들지 않아 손이 덜 피곤하고, 잉크가 끊기지 않는다. 다만 손날로 문지르면 번지는 겉마름 문제가 있으니, 나처럼 급하게 쓰고 바로 페이지를 쓸어 넘기는 사람이나 왼손으로 쓰는 사람은 겉마름 빠른 유성 쪽이 편하다.

공부용은 절충이 필요하다. 오래 쓰면 손이 아프니 필압이 낮은 중성이 편한데, 형광펜을 자주 긋는다면 염료 잉크 위에서 번질 수 있다. 안료 중성펜이면 두 조건을 다 받아 준다. 얇은 종이 노트를 쓴다면 뒷비침이 적은 유성이 다시 유리해진다. 조건을 나열하고 보니 결국 표가 하나 더 필요할 것 같지만, 요지는 단순하다. 펜을 고르는 게 아니라 내 필기 상황을 먼저 고르는 것이다.

나무 책상 위에 나란히 놓인 여러 자루의 펜
겉모습은 비슷해도 안에 든 잉크는 갈래가 다르다

그래서 서랍에는 몇 자루가 필요한가

모든 상황을 받아 주는 펜은 없다. 용매가 정해지는 순간 장점과 단점이 한 묶음으로 따라오기 때문이다. 물에 강하면 필압이 들고, 부드러우면 어딘가에서 번진다. 그러니 답은 두 자루다. 서류용 유성 하나, 긴 필기용 중성 하나. 수성 펜은 필압이 아예 안 들어가는 필기감 자체가 목적일 때만 세 번째 자리를 준다.

반대로 하루 필기량이 서명 몇 번이 전부인 사람에게는 이 구분이 통째로 필요 없다. 유성 한 자루면 끝난다. 잉크 용매의 세계는 그런 사람을 붙잡지 않는다. 자정 넘어까지 용매 이야기를 읽고 있던 사람이 문제라면 문제다. 다음에는 굳어서 안 나오는 볼펜을 살릴 수 있는지 알아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