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통을 정리하다가 같은 모델의 볼펜이 세 자루라는 걸 발견했다. 잉크가 다 되면 리필심 대신 매번 새 펜을 샀던 흔적이다. 리필이 있는 줄 몰랐던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본체를 샀을까. 게으름이라고 결론 내리기 전에, 그 게으름이 실제로 얼마짜리인지 한번 계산해 보기로 했다. 결과는 예상과 조금 달랐다. 답은 펜에 따라 다르다였고, 그 갈림길이 이 글의 주제다.
가격 구조가 두 종류다
시중 가격들을 모아 스프레드시트에 정리해 보니, 펜의 세계는 리필 관점에서 두 부류로 나뉜다는 게 보였다. 저가 펜은 본체 가격과 리필심 가격이 거의 붙어 있다. 본체가 천 원인데 리필이 칠팔백 원인 식이다. 이 구간에서 리필은 경제 행위가 아니라 그냥 취향의 문제다. 그립이 길든 몸통에 정이 들었든, 돈으로는 딱히 정당화가 안 된다. 중가 이상의 펜은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본체는 만 원인데 리필은 이삼천 원처럼 리필이 본체의 몇 분의 일 가격이 되면서, 몇 번만 리필해도 본체 값을 회수하는 산수
서랍을 정리하다가 볼펜을 아홉 자루 발견했다. 시필을 해보니 네 자루가 안 나왔다. 버리려고 모아 쥐는데 손이 멈췄다. 잉크가 절반 넘게 남은 게 훤히 보이는데, 이것들은 대체 왜 침묵하는가. 버리는 일은 자연스럽게 미뤄졌고, 굳은 볼펜의 사인을 규명하는 일이 대신 시작됐다. 이런 식으로 청소가 조사로 바뀌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굳는 경로는 하나가 아니다
공개 자료를 종합하면 안 나오는 볼펜의 사인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용제의 증발이다. 유성 잉크는 염료를 알코올 계열 용제에 녹인 것인데, 펜 끝 볼과 소켓 사이의 미세한 틈으로 용제가 아주 천천히 달아난다. 용제가 줄면 잉크 점도가 계속 올라가다가 결국 볼이 구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뚜껑을 잃어버린 펜이 먼저 가는 이유가 여기 있다.
두 번째는 팁 표면의 건조 피막이다. 볼에 묻은 채 공기와 만난 잉크가 말라붙어서 마개 역할을 해버린다. 속은 멀쩡한데 입구만 막힌 상태라, 살릴 가능성이 가장 높은
다이어리를 사흘 밀리고 몰아 쓰는 밤이었다. 손에 잡히는 볼펜으로 첫 줄을 썼는데 종이를 긁는 느낌이 거슬려서 다른 펜으로 바꿨더니, 이번에는 미끄러지듯 나갔다. 둘 다 촉은 0.5mm였다. 같은 규격인데 경험이 다르다면 규격이 말해주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고, 그런 걸 발견하면 이 책상에서는 하던 일이 멈춘다. 밀린 일기는 결국 다음 날로 넘어갔다. 우선순위가 이상하다는 자각은 있는데, 고칠 생각은 별로 없다.
0.5mm라는 숫자가 말해주지 않는 것
펜 포장의 0.5mm는 볼의 지름, 정확히는 선폭 규격이다. 필기감에 대한 정보가 아니다. 그 바깥에서 필기감을 쥐고 흔드는 변인이 있으니, 공개된 자료를 종합하면 대부분 잉크의 점도다.
점도, 자릿수가 다르다
제조사들이 공개한 스펙을 한 표에 모았다. 결국 스프레드시트를 열었다는 뜻이고, 여기까지 오면 이 조사는 끝을 보게 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숫자의 크기가 아니라 단위였다. 유성 잉크와 젤 잉크는 점도가 몇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