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펜 글 끝에서 예고한 숙제를 하러 왔다.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 때 종이 쪽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발단은 노트 쇼핑몰의 후기였다. "만년필에는 무조건 100gsm 이상"이라는 문장이 상식처럼 반복되고 있었는데, 평량은 종이 1제곱미터의 무게일 뿐이다. 무게가 무거우면 안 비친다는 게 정말일까. 스펙 자료를 모아 따져봤더니 절반만 맞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런 절반짜리 상식이야말로 이 책상이 좋아하는 먹잇감이다.

용어부터, 비침과 번짐은 다른 사건이다

후기들이 "비친다"로 뭉뚱그리는 현상은 사실 둘이다. 비침(show-through)은 뒷면 글씨가 종이를 투과해 어른거리는 것으로 빛의 문제고, 번짐(bleed-through)은 잉크가 종이를 뚫고 뒷면까지 도달하는 것으로 침투의 문제다. 원인이 다르면 처방도 달라야 하는데, 둘을 섞어 부르는 순간 "두꺼운 종이 사면 해결"이라는 절반짜리 답이 태어난다.

비침과 번짐의 차이를 보여주는 종이 단면 모식도
비침(투과)과 번짐(침투)의 차이 모식도

평량은 무게 지표다, 차폐 지표가 아니라

평량(gsm)은 말 그대로 단위 면적당 무게다. 같은 80gsm이라도 섬유를 촘촘히 눌러 만든 얇고 밀도 높은 종이가 있고, 폭신하게 부풀려 만든 두껍고 성긴 종이가 있다. 비침을 정하는 것은 무게가 아니라 불투명도(opacity)다. 섬유 밀도와 충전제, 표면 처리가 합작해서 만드는 값이고, 제지사 스펙시트에는 실제로 퍼센트 단위로 따로 적혀 있다. 평량이 높으면 불투명도도 높은 경향이 있을 뿐, 비례하는 사이는 아니다.

번짐 쪽은 평량과 더 멀다. 잉크 침투를 막는 것은 사이징(sizing), 그러니까 종이에 입히는 발수 처리다. 사이징이 좋은 70gsm은 만년필 잉크를 표면에 잡아두고, 사이징이 약한 100gsm은 잉크를 속으로 쭉쭉 빨아들인다. 얇은데 만년필이 잘 되는 종이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두꺼운 스케치북이 의외로 뒷장까지 번지는 이유다.

펼쳐진 노트와 펜
노트 종이, 평량보다 사이징이 일한다

스펙시트를 모아 보면

제지·문구 브랜드들의 공개 자료를 한 표에 모았다. 이 표를 만드는 데 저녁을 통째로 썼는데, 원래는 노트 하나 고르는 일이었다는 사실은 잠시 잊기로 하자. 표에서 패턴이 보였다. 만년필용으로 평가받는 종이들의 공통점은 평량이 아니라 사이징 언급이었다. 52gsm인데 만년필 용지로 팔리는 얇은 종이가 있는가 하면, 120gsm 크라프트지가 수성 잉크를 뒷면까지 통과시키기도 한다. 평량 단독 지표는 볼펜과 연필 사용자에게나 통하는 근사치다. 유성 잉크는 애초에 침투가 얕아서 웬만한 종이가 다 받아준다. 젤펜 글의 점도 이야기가 정확히 여기로 이어진다.

그래서 무엇을 보고 고르나

조건별로 정리해 보자. 볼펜과 연필 위주로 한 면만 쓴다면 평량은 사실상 아무래도 좋다. 70gsm 복사지도 충분하다. 양면 필기를 한다면 관건은 불투명도인데, 스펙에 표기가 없으면 90gsm 이상에서 고르는 것이 안전한 근사치가 된다. 만년필과 수성 잉크 사용자라면 평량 숫자를 잊고 "만년필 대응"을 명시한 종이, 즉 사이징을 관리한 종이를 찾는 쪽이 빠르다. 100이라는 숫자 자체는 아무것도 보증해 주지 않는다.

"평량이 높을수록 좋은 종이"라는 통념은 비침의 절반만 설명하고 번짐은 아예 설명하지 못한다. 100gsm과 120gsm의 차이를 눈으로 구분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으로 추정한다. 통념에 웃돈을 낼 이유는 없다. 스펙시트의 다른 줄을 읽는 눈이 있으면 되는 것이고, 그 눈은 방금 장만하셨을 것이다. 다음 궁금증도 종이 위에 있다. 사이징 좋은 종이 위에서 연필은 왜 진하기가 제각각인가. 심 경도 이야기를 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