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 답안지를 채점하다가 샤프를 몇 번이나 눌렀는지 세어 본 적이 있다. 한 장에 노크 서너 번, 백 장이면 삼사백 번이다. 손가락이 아니라 리듬이 끊기는 게 문제였다. 채점 흐름이 뚝뚝 끊기던 어느 밤, 오토매틱 샤프라는 물건을 알게 됐다. 노크를 아예 안 눌러도 심이 계속 나온다는데, 처음 든 생각은 배터리라도 들었나 하는 것이었다.

답부터 말하면 배터리는 없다. 오토매틱 샤프는 필기할 때 손이 만드는 압력의 왕복을 노크 대신 쓴다. 이 글은 그 구조가 정확히 뭘 하는지, 오렌즈 네로와 파일럿 S30과 쿠루토가 다이브가 이 구조를 어떻게 다르게 구현했는지, 그리고 이 방식이 흔들이 샤프와는 뭐가 다른지까지 공개 자료를 종합해 정리한다.

오토매틱 샤프는 왜 노크 없이 심이 나오나

심을 내보내는 힘은 노크 버튼이 아니라 필기할 때 촉이 받는 압력의 왕복에서 나온다. 종이에 힘을 주는 순간 촉 안쪽 파이프가 아주 살짝 안으로 눌려 들어가고, 그 안의 스프링이 압축된다. 펜을 종이에서 떼는 순간 압축된 스프링이 파이프를 도로 밀어내는데, 이 왕복 한 번마다 심을 물고 있는 척이 살짝 전진하며 심을 조금 내보낸다. 샤프 노크 구조에서 다룬 척과 조의 관계가 여기서도 그대로 쓰인다. 다른 것은 그 척을 움직이는 힘의 출처뿐이다. 노크식은 엄지가 미는 힘이고, 오토매틱은 필기가 만드는 압력의 왕복이다. 그러니까 글자를 쓰고 떼는 한 획 한 획이 노크 버튼 하나를 대신 누르는 셈이다.

필기 압력이 파이프를 눌렀다 스프링으로 되밀며 심을 내보내는 3단계를 그린 모식도
누르고 떼는 한 획이 노크 하나를 대신한다 (모식도)

세미오토매틱과 풀오토매틱은 뭐가 다른가

시중 오토매틱 샤프는 대부분 세미오토매틱이고, 이 둘의 차이는 심 한 자루를 다 쓴 다음에 갈린다. 세미오토매틱은 심이 남아 있는 동안은 노크 없이 계속 나오지만, 한 자루를 다 쓰고 다음 심으로 넘어갈 때는 노크를 한 번 눌러 새 심을 척 앞까지 물려 줘야 한다(안 그러면 파이프 안에 심이 없어서 왕복이 헛돈다). 풀오토매틱은 이 마지막 한 번의 노크까지 없앤 쪽인데, 실제로 시중에서 파는 제품 대부분은 세미오토매틱이다. 완전히 노크가 없는 제품은 드물다는 뜻이고, 오토매틱이라는 이름만 보고 노크가 영원히 필요 없다고 기대하면 새 심을 갈아 끼우는 순간 어리둥절해질 수 있다.

오렌즈 네로 S30 쿠루토가 다이브 구조 비교

같은 원리 위에서도 세 회사는 조금씩 다르게 구현했다. 공개된 제품 설명을 한 표로 모았다.

제품 (제조사) 방식 작동 구조
오렌즈 네로 (펜텔) 세미오토 심을 끝까지 감싸는 슬리브가 필기 왕복에 맞춰 심을 조금씩 내보낸다. 최초 1회만 노크한다
S30 (파일럿) 세미오토 파이프가 필압에 안으로 들어갔다가, 종이에서 완전히 떨어지는 순간 스프링으로 튀어나오며 심을 끌고 나온다
쿠루토가 다이브 (미쓰비시 유니) 세미오토 심을 돌리는 쿠루토가 회전 엔진에 스프링 오토매틱을 결합했고, 배출량을 레귤레이터로 5단계까지 조절한다

오렌즈 네로는 샤프 노크 구조 글에서 다룬 오렌즈의 슬라이딩 슬리브에 왕복 감지 기능을 얹은 쪽이다. 원래 부러짐을 막으려고 만든 슬리브가 이번엔 자동 배출까지 겸한다. 쿠루토가 다이브는 회전과 자동 배출을 한 몸에 얹은 유일한 조합이라 그만큼 내부 부품 수도 가장 많다. 회전 하나, 스프링 왕복 하나, 배출량 조절 하나까지 세 가지 기능이 촉 하나에 들어가 있는 셈이다. 심 굵기별로 부러짐이 갈리는 이유는 샤프심 굵기 글에서 따로 다뤘다.

오토매틱 샤프와 흔들이 샤프는 다른 원리다

둘 다 손가락으로 노크를 안 눌러도 심이 나오지만 그 힘의 출처가 다르다. 흔들이 샤프(관성식)는 사용자가 손목을 위아래로 흔들어야 하고, 그 흔들림의 관성으로 내부 무게추가 노크 버튼을 대신 때린다. 능동적으로 흔든다는 동작이 하나 더 필요하다는 뜻이다. 오토매틱은 필기라는 원래 하던 동작 안에서 저절로 트리거되니 사용자가 따로 하는 일이 없다. 그래서 오토매틱 샤프를 아무리 흔들어도 심은 안 나온다(관성으로 때릴 무게추 자체가 없으니까). 반대로 흔들이 샤프는 종이에 대고 쓰기만 해서는 심이 나오지 않는다. 이름이 비슷해서 자주 섞이지만 노크를 대신하는 힘의 정체는 정반대인 셈이다.

오토매틱은 필기 압력, 흔들이 샤프는 흔드는 관성이 노크를 대신한다는 것을 좌우로 비교한 모식도
같은 결과, 다른 트리거 (모식도)
무늬 없는 배경에 놓인 널링 그립과 빨간 밴드가 있는 드로잉용 샤프펜슬 클로즈업
오토매틱 구조는 이런 익숙한 겉모습 안에 들어가 있다

오토매틱 샤프는 누구에게 필요한가

손을 멈추지 않고 오래 쓰는 상황일수록 오토매틱의 이득이 크다. 답안지 채점처럼 필기가 끊기면 리듬이 깨지는 작업, 회의록처럼 손을 계속 움직여야 하는 상황, 제도처럼 선 하나에 집중이 필요한 작업이 여기 해당한다. 반대로 하루 몇 줄 메모가 전부인 사람에게는 부품이 늘어난 만큼 무게와 가격만 오르고 체감 이득은 적다. 노크 한두 번 누르는 게 그렇게까지 번거로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토매틱은 노크를 없앤 발명이라기보다, 노크할 타이밍을 손이 아니라 필기 자체에 맡긴 설계에 가깝다.

이 구조를 알아보다가 새벽 한 시를 넘겼다. 정작 다음 날 채점은 손이 아니라 심이 부족해서 중간에 멈췄다. 노크 걱정은 안 해도 됐는데 심 재고 걱정을 새로 얻은 셈이다. 이쯤 되면 걱정거리는 줄이는 게 아니라 종류를 바꾸는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