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여행 가방에 넣어 뒀던 만년필을 꺼내 첫 줄을 그었더니 잉크가 뚝뚝 끊겼다. 분명 캡을 끝까지 눌러 닫아 뒀는데도 이 모양이었다. 볼펜이었으면 새로 사면 그만인데, 만년필은 닙을 씻어야 하나 컨버터를 다시 채워야 하나 머릿속만 복잡해졌다.

캡을 닫아도 닙이 마르는 이유는 캡의 밀봉 구조 자체에 있다. 나사를 돌려 잠그는 캡과 눌러서 딸깍 닫는 캡은 밀폐력이 다르고, 그 안에 이너캡이 따로 있는지도 다르다. 그래서 밤 늦게 특허 문서까지 뒤졌다(원래는 캡 제대로 닫는 법만 확인하려던 것이었다). 어떤 구조가 왜 덜 마르게 만드는지 정리했다.

은색 만년필 몸통과 파란색 캡이 나란히 놓여 있고, 캡 입구 쪽 나사산이 뚜렷하게 보인다
나사산이 보이는 만년필 캡과 몸통

만년필 캡, 밀봉이 안 되면 왜 닙이 마르나

닙이 마르는 건 잉크 속 용매 성분이 증발하기 때문인데, 이 증발 속도를 좌우하는 게 캡 내부의 밀폐 정도다. 대부분의 만년필은 캡 안쪽에 있는 턱(숄더)이 펜 몸통(섹션) 끝에 맞닿으면서 닙 주변 공간을 막는 방식으로 밀봉한다. 별도 장치 없이 두 부품이 맞닿는 접촉면 하나가 밀봉의 전부인 셈이다.

그런데 이 접촉면이 완전히 밀폐되어 있지는 않다. 펜 애호가 커뮤니티의 실무자 설명에 따르면, 닙 뒤쪽에는 흔히 브리더 홀이라는 작은 구멍이 있어서 캡을 나사로 조일 때 안쪽 공기가 이 구멍으로 빠져나가 진공이 생기는 걸 막아 준다. 완전 밀폐를 노리는 구조가 아니라, 압력을 조절하면서 공기 흐름 자체는 최소화하는 절충안에 가깝다. 1940년대 특허 하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바깥 셸과 안쪽 셸 사이에 통로와 홈을 파서, 압력은 균등해지되 닙 근처로 직접 공기가 흐르지는 않게 막는 이중 셸 구조를 제안했다.

나사식 캡과 스냅식 캡, 밀봉력이 왜 다른가

나사식은 조여서 압착하는 구조라 밀봉이 강하고, 스냅식은 마찰 하나로 버티는 구조라 시간이 지나면 헐거워진다. 만년필 설계를 다루는 한 자료는 나사식 캡의 스레드를 120도 간격으로 세 줄 배치하는 구조로 설명한다. 게다가 나사산을 여러 줄 동시에 새겨 놓는 다중 시작 방식이라 한 바퀴도 채 돌리지 않아도 완전히 잠긴다. 과하게 조여 나사산이 상하지 않도록 멈춤 턱, 이른바 정지장치까지 달아 둔다.

스냅식은 다르다. 초기 설계는 원뿔 모양의 마찰력만으로 캡을 고정했는데, 마찰력은 쓸수록 닳는다. 이후 리프 스프링이나 클릭 걸림쇠를 더해 고정력을 보강한 제품이 늘었지만 뼈대는 여전히 마찰이다. 펜 애호가 커뮤니티에서는 이 차이를 두고 나사산은 황동관에 압착해 끼우기 때문에 꽤 타이트해야 하고, 스냅식은 거의 항상 느슨해서 실질적으로 밀봉할 방법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나사식 캡의 나사산과 정지장치, 스냅식 캡의 원뿔 마찰 구조를 나란히 비교한 그림
만년필 캡 개폐 방식별 밀봉 구조 비교 모식도

이너캡이 있는 펜과 없는 펜, 뭐가 다른가

숄더 접촉 하나로 막는 펜과 별도 슬리브를 하나 더 넣은 펜은 밀봉 층의 개수 자체가 다르다. TWSBI의 에코나 고 같은 모델은 캡 안쪽에 플라스틱 이너캡을 따로 끼워서, 바깥 캡이 헐거워지더라도 이 안쪽 슬리브가 한 번 더 밀폐 공간을 만든다. 실사용 후기에서도 며칠을 방치해도 닙이 안 마른다는 반응이 자주 나온다.

이너캡이 없는 펜은 캡과 섹션의 접촉면 하나에 밀봉을 전부 걸어야 한다. 나사식이라 조임이 확실하다면 큰 문제는 없지만, 오래 쓰면서 섹션이나 캡 안쪽이 미세하게 마모되면 접촉이 헐거워질 수 있다. 피드 슬릿까지 잉크가 마르면 흐름 자체가 끊기는데, 캡이 헐거워지는 걸 방치하면 결국 이 문제로 이어진다.

캡을 뺄 때 왜 진공이 잉크를 끌어올리나

캡을 씌울 때는 안에 있던 공기가 눌리고, 뺄 때는 반대로 빈 공간이 생기면서 진공이 잉크를 닙 쪽으로 끌어당긴다. 이 원리를 직접 관찰한 글이 있는데, 캡을 뺄 때 생기는 흡입 효과가 단순히 마름을 막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미 말라붙은 닙을 다시 적셔 주기까지 한다는 내용이다. 저자는 롤러볼 펜의 캡 끝을 손전등으로 비춰 보고 거의 밀폐에 가까운 아주 좁은 공간을 확인했다고 적었다.

이 압력 차는 캡과 섹션 사이 틈의 크기에 좌우된다. 만년필 설계 자료가 실제 펜 7종의 캡-섹션 지름 차를 재 보니 평균 0.7mm(0.2~1.0mm 범위)였다. 틈이 벌어질수록 공기가 드나들 수 있는 단면적도 커지는데, 같은 자료의 계산으로는 지름 차가 0.2mm일 때 약 3.2제곱밀리미터였던 면적이 0.6mm로만 벌어져도 9.7제곱밀리미터로 커진다. 세 배 가까이 뛰는 셈이다(이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계산기 앱을 켰다). 나사식은 천천히 돌려 빼는 만큼 이 압력 변화도 완만하고, 스냅식은 순식간에 빠지는 만큼 압력 변화도 급격하다. 다만 개폐를 반복할수록 이 압력차가 피드의 좁은 틈에 잉크를 자꾸 밀어 넣어서, 결국 잉크가 새어 나오는 현상으로 이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주기적으로 세척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캡을 씌울 때 공기가 압축되고 뺄 때 진공이 생겨 잉크를 끌어올리는 과정을 비교한 그림
만년필 캡 개폐 시 압력 변화(펌핑 작용) 모식도

그래서 어떤 캡을 신경 써야 하나

매일 쓰는 사람에게는 캡 방식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자주 열고 닫는 만큼 닙이 마를 틈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반면 여행용이나 세컨 펜처럼 며칠에서 몇 주씩 그대로 두는 펜이라면 나사식에 이너캡까지 있는 조합이 유리하다. 밀봉 층이 두 겹이라 방치 기간에 더 잘 버틴다.

스냅식이라도 매일 쓰는 사람에게는 이 모든 차이가 사실 무의미하다. 밀봉력 차이가 드러나는 건 결국 오래 방치했을 때이고, 자주 쓰는 펜은 그럴 일이 없다. 딸깍 소리 하나로 여닫는 편리함을 포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글 하나 쓰겠다고 1940년대 특허 도면을 뒤지다가, 이중 셸이라는 단어를 보고 한참 딴 데로 샜다. 다음엔 캡을 아예 안 쓰는 회전식 만년필은 닙을 어떻게 보호하는지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