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 리필을 사러 문구점에 들어섰다가 진열대 앞에서 멈춰 선 적이 있다. Parker, D1, G2라고 쓰인 라벨들이 나란히 꽂혀 있는데, 지금 쓰는 펜에 어떤 규격이 들어가는지 모른다. 검색을 해봐도 "G2 규격"이 파커 방식 볼펜심을 가리키는 건지 파일럿 G2 젤펜 리필인지 헷갈린다. 이 혼란은 제품 이름과 규격 이름이 겹쳐 있는 데서 시작한다.
볼펜 리필에는 사실상 세 분류가 있다. 크기 기준의 국제 표준인 D1, 브랜드 표준에서 출발해 국제 표준이 된 Parker G2 방식, 그리고 제조사별 독자 규격. 세 분류는 치수가 달라 서로 교체가 안 된다. 어느 쪽에 속하는지 알면 구매 전에 호환 문제를 미리 피할 수 있다.
D1 규격이란 무엇인가
D1은 ISO 12757-1로 정의된 국제 표준 규격이다. 길이 67mm, 지름 2.3mm — 볼펜 리필 가운데 가장 작은 분류다. 이 크기가 필요한 이유는 구조적으로 명확하다. 4색이나 5색 볼펜처럼 하나의 몸통 안에 여러 리필심을 나란히 넣어야 하는 멀티펜, 또는 명함 지갑이나 다이어리 끝에 꽂아 쓰는 미니 볼펜은 리필이 짧고 얇아야 겹치지 않고 작동한다.
멀티펜 내부 전환 구조가 캠과 슬라이딩 레일로 각 리필을 독립적으로 내리는 원리인데, 이 구조가 D1 치수 안에서 여러 심이 동시에 수납될 것을 전제하고 설계된다. 제트스트림 멀티펜(SXR-D 계열), 파일럿 닥터 그립 멀티, 파카 조터 멀티에 들어가는 리필이 모두 D1이다. 제조사마다 잉크 성분과 팁 마감이 달라 필기감 차이는 있지만, 외형 치수(67mm × 2.3mm)는 동일하다.
[IMAGE:ballpoint-refill-compatibility-guide-photo-1.jpg|책상 위 노트 위에 놓인 볼펜|]
D1 규격 리필은 슈나이더, 라미, 카렌다쉬, 제트스트림이 각자 만들어 판매하며, 치수가 같다면 브랜드 간 교차 삽입이 가능하다. 단, 펜 몸통이 리필을 고정하는 위치와 각도가 제품마다 조금 달라 같은 D1이어도 팁이 정확히 돌출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구매 전 공식 호환 목록을 확인하거나 기존 리필을 들고 가는 편이 실수가 적다.
Parker G2 방식이란 무엇인가
Parker G2(ISO 12757-2)는 파커가 오래전부터 써온 볼펜 리필 치수가 국제 표준으로 채택된 규격이다. 길이 약 98mm, 지름 6.3mm — D1의 두 배 이상 큰 크기다. 국내에서 "볼펜심"을 따로 설명 없이 부를 때 보통 이 형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파커 조터를 비롯해 파버카스텔, 슈나이더, 스테들러, 몽테그라파, TWSBI 등 유럽과 북미의 볼펜 브랜드 대부분이 이 치수를 채택했다. 국내에서는 모나미 FX700이 Parker G2 방식으로 만들어져 파커 볼펜에 그대로 들어간다. 파커 쪽 공개 자료를 보면 현재 90개 이상의 브랜드가 이 치수를 따른다고 밝히고 있다.
왜 이 규격이 이렇게 넓게 퍼졌는가. 파커가 수십 년 전부터 써온 치수인데다 후발 제조사가 파커와 호환되는 심을 만들면 기존 파커 사용자에게 자연스럽게 팔 수 있어서다. 결과적으로 Parker G2 방식은 단순한 표준 이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선택 가능한 대체 리필 수가 가장 많은 규격이라는 점은 리필형 볼펜의 장기 경제성을 따질 때 실질적인 장점이 된다.
표준 밖의 독자 규격들
워터맨, 몽블랑, 라미 일부 모델은 Parker G2와 외형이 비슷해 보여도 치수가 맞지 않는다. 라미 볼펜의 경우 'M16'이라는 독자 규격을 쓰는데, 길이는 Parker G2에 가깝지만 팁 끝부분의 노출 각도와 마감 치수가 달라 그대로 교체가 안 된다. 몽블랑은 전통적으로 자체 규격을 고집한다. 슈나이더의 Slider 계열 역시 별도 치수다.
볼펜 볼 회전 구조는 제조사마다 팁 마무리 방식이 달라서, 외형 치수를 맞춰도 끝단 가공이 다르면 필기 중 흔들리거나 잉크 흐름이 달라진다. 독자 규격을 쓰는 브랜드가 공식 호환 리필을 따로 판매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다.
Pilot G2와 Parker G2가 같은 규격이 아닌 이유
이 혼동은 유독 자주 생긴다. "G2"라는 이름이 두 곳에서 겹쳐 있기 때문이다. 파일럿 G2는 파일럿 코퍼레이션이 만든 젤펜 브랜드의 이름이다. Parker G2(ISO 12757-2)는 볼펜 리필의 국제 표준 규격 이름이다. 둘은 크기도, 잉크 방식도 다르다.
파일럿 G2 젤펜의 리필(BLS-G2 계열)은 젤 잉크이고 별도 치수로 만들어져 있어 Parker 방식 볼펜에 들어가지 않는다. 젤펜과 볼펜의 잉크 점도 차이가 크기 때문에 같은 팁 구조를 쓸 수 없는 것도 이유다. 검색창에 "G2 리필"을 입력하면 두 제품이 함께 나오는데, 구매 전에 "파일럿 G2 리필"인지 "Parker G2 방식 리필"인지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이 검색을 했다가 잘못된 걸 주문한 다음 알게 된 사람이 세상에 나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규격인지 확인하는 실제 방법
가장 확실한 방법은 펜에서 리필심을 꺼내 길이를 직접 재는 것이다. D1(67mm)인지 Parker G2(98mm)인지 자로 재도 구분이 된다. 온라인 구매 시에는 제품 설명에 "D1 규격" 또는 "Parker 방식" 표기가 있는지 확인하고, 단순히 "G2 규격"이라고만 쓰여 있으면 어느 쪽인지 한 번 더 살핀다. 멀티펜이라면 해당 모델 이름으로 검색해 제조사 공식 호환 리필 목록을 찾는 쪽이 "D1이면 다 되겠지"보다 빠르고 정확하다.
리필 규격 문제 하나를 알아보려고 ISO 표준 문서 초록을 펼친 게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결국 엑셀 시트를 열었고, 펜 모델별로 어떤 규격 리필이 들어가는지 정리하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졌다. 밀린 볼펜 리필 주문은 그 다음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