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점 시필 코너에서 같은 0.5가 적힌 볼펜 여섯 자루를 나란히 그어 본 적이 있다(여섯 자루는 과했다는 자각은 있다). 선 여섯 개가 전부 달랐다. 굵기도, 손끝에 오는 감촉도 달랐다. 같은 숫자를 달고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집에 오는 내내 펜 끝에서 구를 작은 공을 생각했다. 볼펜이라는 이름이 앞세우는 그 볼 말이다.

그래서 이 글은 볼펜 볼의 원리를 다룬다. 지름 1mm 안팎의 공이 어떻게 잉크를 종이로 옮기는지, 촉 안쪽은 어떻게 생겼는지, 굵기 표기 0.5는 무엇의 치수인지, 부드러운 볼펜과 긁히는 볼펜은 어디서 갈리는지. 제조사 기술 문서와 공개 자료를 종합해 정리했다.

줄 노트 위에 놓인 은색 볼펜 촉의 확대 사진
볼펜 촉 끝, 필기감의 대부분이 이 작은 공 주변에서 결정된다

볼펜 볼의 원리, 잉크 묻은 공을 굴려서 쓴다

볼펜은 잉크를 뿜지 않는다. 잉크가 묻은 공을 종이 위에 굴린다. 촉 끝 볼의 안쪽 절반은 잉크 관에 잠겨 있고, 잉크가 중력을 타고 내려와 그 면을 적신다. 펜을 끌면 볼이 구르면서 잉크 묻은 면을 종이에 대 주고, 잉크를 넘겨준 면은 돌아 들어가 다시 잉크를 묻힌다. 페인트 롤러가 벽에 칠을 옮기는 것과 같은 순환이다. 롤러 지름이 1mm 안팎이라는 점만 다르다.

이 단순한 구조의 핵심은 균형이다. 1930년대에 헝가리 기자 라슬로 비로가 성공한 지점도 볼 자체가 아니라 조합이었다. 빨리 마르는 되직한 잉크와 볼 구조를 한 세트로 묶은 것. 잉크가 너무 묽으면 새고 너무 되면 나오지 않으며, 소켓이 헐거우면 흘리고 꽉 끼면 볼이 멈춘다. 볼펜은 볼과 잉크와 틈, 셋의 균형 위에서 굴러가는 물건이다.

볼펜 촉의 구조, 진짜 정밀 부품은 소켓이다

촉을 확대하면 부품은 셋이다. 구르는 볼, 볼을 반 넘게 삼킨 채 감싸 쥔 소켓, 그리고 소켓 안쪽에서 볼까지 잉크를 대 주는 좁은 길. 소켓은 입구 가장자리를 안으로 살짝 오므려 볼이 빠지지 않게 물고, 볼과의 사이에 잉크가 지나갈 아주 가는 틈을 남긴다. 이 틈이 넓으면 잉크가 새서 뭉치고, 좁으면 끊긴다. 촉 가공이 1000분의 1mm를 다투는 이유다.

볼이 하는 일이 하나 더 있다. 마개다. 쓰지 않는 동안에는 볼이 소켓 입구에 맞물린 채 잉크 길을 막아서, 잉크가 공기와 만나는 면적을 볼 둘레의 가는 틈만큼으로 줄인다. 당신 가방 바닥에서 뚜껑 없이 굴러다니는 볼펜이 며칠은 버티는 이유다. 물론 한계는 있어서, 굳은 볼펜을 살리는 방법은 볼펜 잉크가 굳는 이유에서 따로 다뤘다.

볼펜 촉 단면 구조: 잉크 관에서 잉크 길을 지나 볼로 이어지는 경로와 오므린 소켓 입구 모식도
잉크는 볼 안쪽을 적시고, 볼이 구르며 종이로 옮긴다 (모식도)

소켓의 어려움을 보여 준 사례가 중국의 볼펜 팁 국산화다. 차이나데일리 보도에 따르면 연간 380억 자루로 세계에서 볼펜을 가장 많이 만드는 중국이 2017년 초까지 소켓용 특수강을 스위스와 일본에서 전량 수입했다. 연간 1,000톤 넘게, 톤당 12만 위안씩 주고서였다. 정작 단단하기로 유명한 텅스텐카바이드 볼은 만들어 수출까지 했다.

어려움의 정체는 재료다. 지름 2.3mm 강선 안에 볼 자리와 잉크 길을 오차 없이 깎아 넣으려면 부드럽게 깎이면서도 무르지는 않은 강재가 필요하고, 미량 원소 배합이 조금만 틀어져도 이 균형이 무너진다. 철강 기업 타이위안강철이 펜 제조사와 5년을 매달려 2017년에야 국산화를 발표했다. 볼펜에서 가장 정밀한 부품은 당연히 볼일 줄 알았는데(공이니까), 판이 뒤집히는 이야기였다.

볼펜 굵기 0.5는 선 굵기가 아니라 볼 지름이다

볼펜에 적힌 0.5, 0.7, 1.0은 볼의 지름이다. 선의 굵기가 아니다. 시판 볼펜의 볼은 0.3mm에서 1.4mm까지 나오고, 실제 선의 폭은 잉크 종류와 필압에 따라 달라진다. 물 성분이 많아 묽은 잉크일수록 종이에 스미며 퍼지니, 같은 0.5라도 젤펜의 선이 유성펜보다 대체로 굵다. 시필 코너의 여섯 선이 제각각이었던 건 속임수가 아니라 규격이 원래 그런 것이었다.

거꾸로 읽으면 고르는 기준이 하나 생긴다. 가는 글씨가 목표라면 표기 숫자만 볼 게 아니라 잉크 종류를 함께 봐야 한다.

굵기 표기 0.5mm는 볼 지름이라는 것과 잉크 종류에 따라 실제 선 폭이 달라지는 것을 나란히 놓은 모식도
표기 숫자는 볼 지름이고, 선 굵기는 잉크에 따라 달라진다 (모식도)

부드러운 볼펜의 조건, 볼 재질과 잉크 점도

부드러운 필기감은 두 군데서 나온다. 볼이 얼마나 매끈하게 구르는가, 그리고 잉크가 볼과 종이 사이에서 얼마나 미끄러운 막을 만드는가.

볼부터 보자. 요즘 볼펜의 볼은 대부분 텅스텐카바이드다. 금속 깎는 공구에 쓰일 만큼 단단한 합금으로, 긁힘에 버티는 정도를 매기는 모스 경도가 9~9.5, 다이아몬드(10)의 바로 아래 급이다. 이렇게 단단해야 하는 이유는 종이 때문이다. 매끈해 보여도 확대하면 섬유가 엉킨 사포에 가깝고, 볼은 그 위를 잉크 한 심이 다할 때까지 구르고도 공 모양을 유지해야 한다. 공이 조금이라도 찌그러지면 소켓과의 틈이 틀어져 잉크가 뭉치거나 끊긴다.

잉크 쪽 절반은 점도의 문제다. 유성 잉크는 되직해서 구름에 저항이 붙고, 젤 잉크는 묽어서 미끄러진다. 두 잉크의 점도가 얼마나 다른지는 젤펜과 유성볼펜의 잉크 점도 차이에 자릿수까지 적어 뒀다. 긁힌다는 감각의 정체는 대체로 둘 중 하나다. 볼과 소켓 사이에 마른 잉크나 종이 가루가 끼어 회전이 매끄럽지 못하거나, 잉크막이 얇아져 볼과 종이가 자꾸 직접 만나거나.

집 필통에서 유난히 긁히던 한 자루를 다시 보니 몇 년 묵은 유성펜이었다. 볼이 닳았다기보다 볼 주변 잉크가 반쯤 말랐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까지 확인한 시각이 새벽 한 시였다. 볼펜은 결백했고 나는 피곤했다.

볼펜 고를 때는 잉크와 지름만 보면 된다

결론. 볼 재질은 따질 필요가 없다. 어느 가격대든 볼은 거의 텅스텐카바이드고, 품질 경쟁은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공정에서 이미 끝나 있다. 고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잉크 종류와 볼 지름이다. 미끄러지는 감각이 좋으면 젤이나 저점도 유성, 필기량이 많고 번짐이 싫으면 표준 유성. 가는 글씨가 목표라면 표기 숫자와 잉크 종류를 같이 본다.

이 기준조차 필요 없는 사람도 있다. 볼펜을 묶음으로 사서 잡히는 대로 쓰고 잃어버리는 쪽이라면 이 글은 잊어도 된다. 어느 볼펜이든 볼은 이미 충분히 훌륭하고, 긁히는 한 자루는 고치려 들지 말고 다음 자루를 꺼내면 된다.

사족. 다음에 문구점에 가면 시필 코너에 또 한참 서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선이 아니라 촉 끝을 들여다보느라. 점원이 이상하게 보겠지만, 궁금한 것이 눈앞에 있으면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