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 일정에 색 구분을 들이기로 했다. 일은 파랑, 개인 약속은 초록, 마감은 빨강. 그래서 4색 볼펜을 꺼내 엄지로 슬라이더를 딸깍거리는데, 문득 손이 멈췄다. 색을 바꿀 때마다 촉이 나오는 구멍은 하나다. 좁은 관 하나를 네 색이 번갈아 지나다니는데, 파란 글씨에는 빨강이 한 톨도 묻어 나오지 않는다. 이게 왜 당연하지.
답부터 말하면 당연한 게 맞다. 4색 볼펜 안에는 잉크관과 촉이 한 몸인 독립 리필이 네 개 들어 있고, 네 잉크는 펜 안 어디에서도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은 4색 볼펜의 내부 구조와 슬라이더가 색을 바꾸는 원리, 그리고 멀티펜의 세계를 지탱하는 공용 리필 규격 D1까지 정리한다. 일정 색 구분은 그날 밤 리필 규격 조사로 번졌고, 정신을 차려 보니 리필 호환표를 만들고 있었다. 표가 나왔다는 것은 이 조사도 끝을 봤다는 뜻이다.

4색 볼펜에는 펜이 네 자루 들어 있다
색이 안 섞이는 이유는 구조 그 자체다. 4색 볼펜의 리필은 잉크관 끝에 볼과 촉이 통째로 달린, 그러니까 몸통만 없는 볼펜 한 자루다. 겉에서 보이는 촉 구멍은 통로일 뿐이고, 종이에 닿는 촉은 항상 지금 선택된 리필의 것이다. 파랑을 쓸 때 나와 있는 촉과 빨강을 쓸 때 나와 있는 촉은 물리적으로 다른 부품이다. 잉크가 섞이려면 두 잉크가 만나는 지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지점이 설계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4색 볼펜은 펜 한 자루라기보다 네 자루를 묶어 놓은 케이스에 가깝다. 축이 일반 볼펜보다 뚱뚱한 것도, 리필 하나하나가 가늘고 잉크량이 적은 것도 같은 이유다. 한정된 축 지름 안에 네 자루 몫의 잉크관과 스프링과 전환 장치까지 들어가야 하니, 각자의 몫은 가늘어질 수밖에 없다. 볼과 잉크가 글씨를 만드는 원리 자체는 단색 볼펜과 같고, 그 이야기는 볼펜 볼 원리 글에 있다.
슬라이더를 누르면 일어나는 일: 밀어내고 잠근다
색 전환의 핵심은 두 동작이 한 번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슬라이더를 내리면 그 슬라이더의 작은 돌기가 지금 나와 있던 리필의 잠금을 밀어서 푼다. 풀린 리필은 스프링 힘으로 제자리로 올라간다. 같은 동작으로 새 리필은 아래로 내려가 촉 구멍에 정렬되고, 걸림턱에 걸려 고정된다. 딸깍 소리 한 번에 퇴장과 입장과 잠금이 순서대로 끝난다. 두 촉이 동시에 나올 수 없는 것도 이 상호 잠금 구조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이 구조의 원형이 1970년 프랑스 빅(BIC)이 내놓은 4색 볼펜이다. 학생들이 검정, 파랑, 빨강, 초록 네 자루를 들고 다니는 문제를 스프링 달린 카트리지 네 개와 슬라이더로 해결했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같은 구조로 팔린다. 오래 살아남은 설계에는 이유가 있는 법인데, 이 경우에는 부품 몇 개로 상호 잠금까지 해결한 경제성이 그 이유일 것이다.
요즘 멀티펜의 색 선택 방식: 슬라이더, 중력, 조립
슬라이더가 표준이지만 다른 답도 있다. 중력 선택식은 축에 슬라이더가 아예 없다. 펜 위쪽의 색 표시를 하늘로 향하게 돌려 쥐고 노크를 누르면, 내부의 작은 쇠 추가 기울기를 감지해 그 색 리필을 내려보낸다. 축이 매끈해지는 대신 손 안에서 펜을 돌리는 동작이 하나 늘어난다. 라미 2000 멀티펜이 이 방식의 대표다.
조립식 멀티펜은 선택을 구매 단계로 앞당긴 경우다. 빈 축을 사고 원하는 색과 굵기의 리필을 골라 끼운다. 파랑 둘에 빨강 하나, 샤프 유닛 하나 같은 구성이 가능해서, 네 색이 균등하게 닳지 않는 사람에게 합리적이다. 실제로 4색 볼펜의 고전적인 불만은 파랑만 먼저 죽는다는 것이었다. 색마다 소모 속도가 다른데 묶음으로만 팔면, 잘 쓰는 색의 수명이 펜 전체의 수명처럼 느껴진다.
멀티펜 리필 규격 D1: 브랜드가 달라도 갈아 끼운다
조립과 교체가 가능한 것은 리필 규격이 사실상 표준화된 덕분이다. 멀티펜용 가는 리필은 D1이라고 부르는 규격이 널리 쓰인다. 길이 약 67mm의 가는 원통형으로, 여러 문구 브랜드가 같은 치수로 만들기 때문에 축과 리필의 브랜드가 달라도 호환되는 경우가 많다. 잉크도 유성만 있는 게 아니라 저점도 유성, 젤, 가압식까지 나온다. 잉크 종류별 성격을 알고 있다면 같은 축을 전혀 다른 펜으로 바꿔 쓸 수 있다는 뜻이다.
리필 교체가 새 펜 구매보다 이득인지는 단색 볼펜에서도 따져 본 적이 있는데(볼펜 리필심 경제성), 멀티펜은 계산이 조금 다르다. 축이 비싸고 리필이 가늘어 잉크가 빨리 떨어지는 대신, 축 하나로 색 구성을 계속 바꿀 수 있다. 축을 오래 쓸수록 이득이 쌓이는 구조라, 멀티펜이야말로 리필로 운영할 때 본전이 나오는 물건이다.
4색 볼펜이 필요한 사람, 필요 없는 사람
기록에 색으로 층위를 주는 사람에게 4색 볼펜은 펜 세 자루 몫의 자리를 아껴 준다. 회의록에서 결정과 할 일을 색으로 가르거나, 다이어리에서 일과 약속을 구분하거나, 채점과 첨삭이 일상인 경우라면 슬라이더 한 번이 펜 바꿔 쥐기를 대신한다. 색 구분 체계를 어떻게 짤지는 인덱스탭 색상 코딩 글에서 다룬 원칙, 색은 적을수록 강하다는 이야기가 그대로 적용된다.
반대로 종이에 한 색만 쓰는 사람에게 4색 볼펜은 잉크 적은 가는 리필 네 개를 들고 다니는 손해에 가깝다. 단색 볼펜의 통통한 리필 하나가 훨씬 오래 간다. 나는 색 구분 계획 덕분에 필요한 쪽에 남기로 했다. 다만 파랑만 먼저 닳는 문제의 당사자가 될 예정이라, 다음 조사는 아무래도 조립식 멀티펜의 리필 단가 비교가 될 것 같다. 호환표는 이미 만들어져 있으니 절반은 온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