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점 진열장 앞에서 닙에 14K라고 새겨진 만년필을 한참 들여다봤다. 금이라니까 써 보지도 않았는데 왠지 더 부드러울 것 같았다. 근거는 없었다(진열장 앞에서 하는 생각치고는 너무 근거가 없다). 그래서 근거를 찾아봤다.

스틸닙과 골드닙의 필기감 차이는 재질 하나로 정해지지 않는다. 금 닙이 스테인리스 닙보다 부드럽다는 건 제조사도 인정하지만, 부드러운 정도는 닙의 두께와 모양에도 좌우되고 매끄러움은 종이에 닿는 맨 끝의 팁이 정한다. 제조사 설명과 판매처 가이드를 교차해서 재질이 어디까지 영향을 주는지 정리했다.

스틸닙과 골드닙, 재질은 이렇게 다르다

스틸닙은 특수 스테인리스로, 골드닙은 금에 다른 금속을 섞은 합금으로 만든다. 14K는 금이 58.5%, 18K는 75%이고 나머지는 다른 금속이다. 21K는 24분의 21이니 87.5%가 된다(계산값). 세일러 공식 페이지는 이 세 가지 금 닙을 부식에 강하고 탄성이 풍부하며 숫자가 클수록 닙 자체가 부드럽다고 설명한다. 스테인리스는 금 닙보다 단단해서 필압의 영향을 덜 받고 선 굵기가 일정하게 나온다는 설명이다.

재질 금 함량 세일러 설명 기준 성질
특수 스테인리스 없음 금 닙보다 단단하고 선 굵기가 일정하다
14K 58.5% 부식에 강하고 탄성이 있다
18K 75% 14K보다 부드럽다
21K 87.5% (계산값) 18K보다 부드럽다

금 함량이 높을수록 무르다는 방향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 방향이 필기감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골드닙이 더 부드럽게 느껴지는 이유와 한계

금 합금은 눌렸다가 되돌아오는 탄성이 있어서, 필압을 받으면 살짝 양보하는 느낌이 난다. 판매처 가이드들은 이 느낌을 쿠션이나 충격 흡수에 빗댄다. 하지만 부드러운 정도를 정하는 요인이 재질만은 아니다.

위키백과 닙 항목은 닙이 휘는 정도를 바꾸는 요인으로 다섯 가지를 든다. 금속판 두께, 닙을 누른 곡면, 숨구멍 모양, 갈라진 틈의 길이, 그리고 합금이다. 두껍고, 깊게 굽고, 숨구멍이 작고 둥글고, 틈이 짧을수록 단단해진다. 다섯 개 중 네 개는 같은 재질로도 바꿀 수 있는 설계 요소다. 결국 시트를 열어 다섯 요인을 한 줄씩 적었는데, 재질이 다섯 줄 중 마지막 한 줄이라는 게 좀 머쓱했다(분명 재질 이야기를 하려고 시작했다).

닙 두께 곡면 숨구멍 틈 길이 합금 다섯 요인별로 단단해지는 쪽과 부드러워지는 쪽을 비교한 모식도
닙의 탄력을 정하는 다섯 요인 중 재질은 하나다 (모식도)

만년필이 매끄럽게 써지는 건 재질이 아니라 팁 때문이다

종이에 실제로 닿는 건 금도 스틸도 아니고 닙 끝에 붙은 작은 알갱이, 팁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금 닙과 대부분의 스틸 닙은 백금족 금속이 든 단단한 합금을 닙 끝에 납땜이나 용접으로 붙인 뒤, 틈을 내고 갈아서 최종 모양을 만든다. 흔히 이리듐이라고 부르지만 1950년대 중반 이후로는 이리듐이 든 합금을 쓰는 제조사가 거의 없다고 한다.

스틸 닙과 골드 닙 모두 몸통 끝에 같은 종류의 팁 알갱이가 붙어 종이에 닿는 구조 모식도
종이에 닿는 것은 몸통이 아니라 끝의 팁이다 (모식도)

그러니 매끄러움은 팁의 모양과 연마 상태, 갈라진 두 갈래가 어긋나지 않았는지에서 나온다. Bottle and Plume과 Hörner, 두 판매처의 가이드가 같은 결론이다. 잘 다듬은 스틸닙이 마감이 거친 골드닙보다 매끄러울 수 있다는 것. 몸통 재질이 만드는 차이는 종이에 닿는 순간의 감촉보다 그 위에서 눌렸을 때의 느낌 쪽이다. Hörner는 잉크 찌꺼기가 쌓이면 필기감이 둔해진다고 덧붙이는데, 이건 만년필 세척 주기와 방법에서 따로 다뤘다.

금색 만년필 닙의 끝부분을 확대한 사진으로 닙 맨 끝에 은색 알갱이가 붙어 있다
닙 색깔만으로는 재질을 알 수 없다. 금색 도금을 입힌 스틸 닙도 있다

골드닙에 대한 흔한 오해 세 가지

스틸닙은 녹슨다는 말은 옛날에는 맞았다. Bottle and Plume에 따르면 금 닙이 19세기에 자리 잡은 이유 중 하나가, 당시 흔했던 철갈 잉크 같은 산성 잉크가 스틸 닙을 부식시켰기 때문이다. 지금은 스테인리스 합금이 좋아지고 잉크도 순해져서 금의 내식성 이점이 예전만큼 결정적이지 않다고 위키백과는 쓴다. 다만 Bottle and Plume은 1950년대 이전의 옛 스틸 닙에는 철갈 잉크를 조심하라고 덧붙인다. 잉크별 성질은 염료·안료·철갈 잉크 비교에 정리해 뒀다.

금 닙은 오래 쓰면 내 손에 길든다는 말도 있다. 길든다는 건 팁이 닳아서 내 필기 각도에 맞는 면이 생긴다는 뜻인데, 위키백과와 Bottle and Plume 모두 현대 팁은 눈에 띄게 닳기까지 여러 해가 걸린다고 설명한다. 이 얘기는 금이라서가 아니라 팁이 단단해서 생기는 일이다.

순도가 높을수록 좋은 닙이라는 것도 오해다. 위키백과 플렉스 닙 항목에 따르면 옛 플렉스 닙은 주로 14K 합금이었고, 금 비율이 더 높으면 영구히 휘어 버릴 위험이 있었다. Bottle and Plume은 금 함량이 높은 세일러 21K 닙이 일부러 꽤 단단하게 설계됐다는 예를 들고, 애호가들이 부드러움과 강도의 균형점으로 14K를 많이 꼽는다고 전한다.

스틸닙이 맞는 사람, 골드닙이 맞는 사람

필압이 세거나 가방에 넣고 다니며 험하게 쓰는 편이면 스틸닙이 맞다. 세일러 설명대로 단단해서 필압 영향을 덜 받고 선 굵기가 일정하고, Bottle and Plume도 힘을 주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소재로 스틸을 꼽는다. 필압이 약하고 누르는 힘에 따라 선 굵기가 살짝 달라지는 걸 즐기면서 오래 쓸 한 자루를 찾는다면 금닙을 볼 만하다. 세일러는 금 닙이 필압에 따라 휘어 선 굵기에 강약이 생기기 쉽다고 설명한다.

반대로 노트에 일정한 굵기로 빠르게 필기하는 게 목적이라면 금닙의 탄력은 있으나 마나다. 가격대도 크게 벌어지는데, Hörner의 표현으로는 금이 사 주는 건 더 나은 필기가 아니라 느낌과 유연성이다. 같은 판매처는 재질보다 필기를 더 크게 바꾸는 게 닙 굵기라고도 하니, 만년필 닙 굵기 표기부터 확인하는 편이 순서다.

이 글은 제조사와 판매처 자료를 교차한 정리이지 직접 써서 비교한 결과가 아니다. 필기감은 손마다 다르고, 파일럿도 공식 안내에서 매장에서 시필해 보고 고르라고 권한다.

재질 이야기를 끝냈더니 다음 궁금증이 벌써 생겼다. 닙 한가운데 뚫린 그 작은 숨구멍은 왜 하트 모양일 때 더 잘 휘는 걸까. 시트는 이미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