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의 책상

만년필

필기구

만년필은 왜 종이를 가리는가, 페더링·번짐·비침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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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에서 만년필을 꺼냈다가 조용히 다시 넣었다. 회사 복사지 위에서 내 글씨가 수염 난 얼룩으로 변하는 걸 봤기 때문이다. 같은 펜이 집의 노트에서는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게 구르는데, 종이가 바뀌자 완전히 다른 도구가 되어버렸다. 만년필은 왜 이렇게 종이를 가리는가. 그동안 이 블로그에서 조각조각 다뤄온 이야기들이 사실 하나의 지도로 모인다는 걸 깨달았고, 오늘은 그 지도를 그려본다. 전제, 만년필은 잉크를 쏟아붓는 도구다 출발점은 잉크 방출량이다. 볼펜의 유성 잉크가 고점도 잉크를 볼로 조금씩 굴려 바르는 방식이라면, 만년필은 저점도 수성 잉크를 모세관 현상으로 흘려보내는 방식이다. 단위 길이당 종이에 도달하는 액체의 양이 필기구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라, 볼펜이 아무 종이에서나 무난한 반면 만년필은 종이의 모든 약점을 사정없이 들춰낸다. 종이를 가리는 게 아니라, 종이의 실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세 가지 참사, 원인을 나눠 본다 복사지 위의 참사를 분해하면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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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버터와 카트리지, 몇 번째 리필부터 이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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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잉크가 떨어졌다는 친구의 두 번째 상담이 왔다. 첫 상담은 닙이었는데, 이번 질문은 리필이다. 카트리지를 계속 사는 게 나을지, 아니면 컨버터라는 걸 사야 할지. 좋은 질문이다. 취향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 절반은 산수 문제라서, 산수부터 하고 취향을 얹는 순서가 맞다. 결국 또 시트를 열었다. 두 번째 상담부터는 시트가 열리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두 방식의 구조 카트리지는 잉크가 담긴 일회용 플라스틱 탱크다. 펜에 꽂으면 내부 침이 막을 뚫으면서 잉크가 흐르기 시작한다. 다 쓰면 버리고 새것을 꽂으면 그만이라, 잉크를 직접 만질 일이 없다. 컨버터는 같은 자리에 꽂는 재사용 탱크다. 피스톤이나 스크류를 돌려서 병잉크를 빨아들이는 구조로, 잉크는 병에서 사와 직접 채운다. 하드웨어로 치면 내장 배터리와 충전지의 관계쯤 된다. 손익분기의 산수 공개된 시중 가격으로 대략 계산해 본다. 브랜드나 환율에 따라 달라지니 자릿수 감각으로만 읽으면 된다. 카트리지는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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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쏟고 알게 된 것, 염료 잉크와 안료 잉크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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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물을 쏟았다. 수습하고 보니 피해가 이상하게 편파적이었다. 다이어리의 볼펜 글씨는 멀쩡한데, 만년필로 쓴 페이지는 파랗게 번져서 졸지에 수채화가 되어 있었다. 같은 잉크라는 이름을 쓰는데 왜 하나는 버티고 하나는 흘러내리는가. 새벽까지 잉크 조성 자료를 읽고 나서야 알게 됐다. 물 쏟은 날 밤에 할 일치고는 좀 뜬금없었지만, 잉크의 세계는 색이 아니라 색을 붙잡아두는 방식으로 나뉜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히 건졌다. 염료 잉크, 색이 물에 녹아 있다 만년필 잉크의 기본값은 염료 잉크다. 색 분자가 물에 완전히 녹아든 상태로, 설탕물처럼 입자가 없는 균일한 용액이다. 이 구조의 장점은 만년필이라는 기계와의 궁합이다. 입자가 없으니 가느다란 잉크 길을 막을 일이 없고, 발색이 맑고 선명하며, 색 배합이 자유로워서 잉크 색 놀이의 대부분이 여기서 일어난다. 대가는 명확하다. 물에 녹아 있던 색은 물을 다시 만나면 도로 녹아버린다. 내 다이어리에서 벌어진 일이 정확히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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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닙 EF·F·M, 같은 F인데 굵기가 다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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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에 입문하겠다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질문은 단 한 줄이었다. EF랑 F 중에 뭐 사. 간단히 답해주려고 표기 체계를 확인하다가, 간단히 답할 수 없는 세계라는 걸 알게 됐다. 닙 굵기 표기는 국제 규격이 아니었다. 같은 F가 브랜드에 따라 다른 굵기를 가리키고 있었고, 결국 친구에게 답장을 보낸 건 그날 밤 늦게였다. 친구의 반응은 "그냥 아무거나 살걸"이었지만, 이 글은 그 답장을 정리한 것이다. 닙 표기는 약속이 아니라 관례다 EF, F, M, B라는 표기는 ISO 같은 표준이 정한 수치가 아니다. 각 제조사가 자기 기준으로 붙이는 상대적인 등급일 뿐이다. 그래서 "F 닙 = 몇 mm"라는 절대 환산표는 존재하지 않고, 공개된 브랜드별 자료를 모으면 같은 F라도 선폭이 대략 0.1mm 이상 벌어진다. 볼펜의 0.5mm 표기가 볼 지름이라는 물리량을 가리키는 것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지점이다. 만년필의 세계는 숫자 대신 문자를, 규격 대신 관례를 쓴다. 일본 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