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프 끝의 작은 지우개는 금방 닳는다는 걸 누구나 안다. 필통 속 블록 지우개가 훨씬 오래 간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이유를 설명해 보라고 하면 "작아서"에서 말문이 막힌다. 작으면 왜 빨리 닳는 걸까. (작아서 닳는다는 건 이유가 아니라 관찰이다. 이 문장을 쓰고 나서야 알았다.)

샤프 지우개가 일반 지우개보다 빨리 닳는 이유는 크기만으로도 상당 부분 설명된다. 같은 힘으로 문질러도 접촉면이 작으면 그 면이 받는 압력이 커지고, 마모 깊이는 압력에 비례한다. 이 글은 공개된 치수로 그 차이가 얼마나 벌어지는지 계산해 보고, 샤프 지우개를 교체할 때 확인할 점까지 정리한다.

샤프 끝 지우개 크기, 블록 지우개와 얼마나 다를까

샤프 끝 지우개는 대체로 지름이 몇 mm인 가는 원기둥이다. 톰보 모노 그래프 라이트의 판매 페이지는 이 샤프에 지름 3.6mm의 모노 지우개가 달린다고 적는다. 톰보 미국 공식 페이지는 모노 그래프의 지우개를 돌려서 뽑아 쓰는 방식이라고 소개하고, 심과 지우개를 모두 리필할 수 있다고 적는다.

블록 지우개는 덩치가 다르다. 펜텔 하이폴리머 ZEH-10은 한 판매처가 7/8 × 2-1/2 × 1/2인치(약 22 × 64 × 13mm), 다른 판매처가 2 × 6.5 × 1.0cm로 적는다. 표기가 조금 어긋나지만 길이 6.5cm, 폭 2cm 남짓, 두께 1cm 남짓이라는 크기는 같다. 재질은 폴리염화비닐(PVC)이라고 소개된다.

샤프 지우개 단면과 블록 지우개의 큰 면과 작은 면을 같은 축척으로 그려 크기를 비교한 모식도
샤프 지우개의 접촉면은 블록 지우개의 작은 면보다도 훨씬 작다 (모식도)

샤프 지우개가 빨리 닳는 이유, 접촉면이 작으면 압력이 커진다

마모의 기본 관계식인 아처드 식(Archard equation)은 마모로 떨어져 나온 입자의 부피 Q가 하중 W와 미끄러진 거리 L에 비례하고, 재료의 경도 H에 반비례한다고 말한다. 식은 Q = K × W × L ÷ H이고 K는 실험으로 정하는 마모 계수다(위키백과 아처드 식 항목). 지우개로 치면 Q는 떨어져 나온 지우개 가루의 부피다.

노란 나무 연필 끝의 분홍색 지우개가 금속 링에 끼워진 채 종이에 닿아 있고 주변에 파란색과 분홍색 지우개 가루가 흩어져 있다
지우개가 닳은 만큼이 가루로 떨어진다

이 식에는 접촉 면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는 건 가루의 부피가 아니라 지우개가 짧아진 길이다. 식의 양변을 접촉 면적 A로 나누면 마모 깊이 h = K × (W ÷ A) × L ÷ H가 된다. W ÷ A는 압력이다. 같은 힘으로 같은 거리를 문질러도 접촉면이 작으면 압력이 커져서 깊이가 더 빨리 파인다.

숫자로 옮겨 보자. 지름 3.6mm 지우개의 단면적은 π × 1.8²으로 약 10mm²다. 블록 지우개의 작은 면은 판매처 치수 기준으로 약 200280mm², 큰 면은 약 1,3001,400mm²다. 같은 힘을 주면 압력은 작은 면 기준 20~28배, 큰 면 기준 130배 안팎으로 벌어진다. 재질과 경도가 같다는 가정에서 마모 깊이도 비슷한 배율로 갈린다는 뜻이다. (전부 공개된 치수로 내가 계산한 값이다.)

다만 한계가 있다. 아처드 식은 금속 마모에서 나온 경험식이라 고무나 PVC 지우개에 그대로 들어맞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마모 계수 K도 조건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위키백과는 가벼운 마모와 심한 마모에서 K가 여러 자릿수 차이 난다고 적는다). 그래도 압력이 높을수록 더 빨리 깎인다는 방향은 같다고 보는 게 무리 없다.

같은 힘으로 누를 때 접촉면이 작은 샤프 지우개는 깊게 닳고 접촉면이 큰 블록 지우개는 얕게 닳는 것을 나타낸 모식도
같은 힘이라도 접촉면이 작으면 압력이 커진다 (모식도)

샤프 지우개가 싸구려라 빨리 닳는다는 건 오해다

샤프 지우개가 빨리 닳는 이유를 재질 탓으로 돌리기 쉽지만, 크기만으로도 설명이 된다. 재질 차이가 영향을 줄 수는 있다. 그래도 경도 H는 식에서 분모에 한 번 들어갈 뿐이고, 접촉면이 20배 작아지면 압력은 20배 커진다. 재질을 따지기 전에 크기부터 봐야 하는 이유다(지우개를 싸구려 취급하던 나부터 머쓱하다). 지우개 재질에 따라 가루가 뭉치거나 흩어지는 차이는 가루 적은 지우개 글에서 따로 다뤘다.

세게 눌러 지우면 더 빨리 닳는다는 것도 식이 그대로 말해 준다. 마모량은 하중에 비례한다. 샤프 지우개로 힘을 줘서 지우면 이미 작은 지우개가 그만큼 더 줄어든다. 지우개가 종이에서 흑연을 떼어내는 원리는 지우개 원리 글에 정리해 두었다.

샤프 지우개 교체, 규격이 여러 가지라 호환부터 본다

닳은 샤프 지우개는 교체하는 소모품이다. 톰보는 모노 그래프용 교체 지우개를 3개들이 리필로 따로 판다. 펜텔 일본 공식 페이지는 샤프용 교체 지우개를 Z2-1N을 포함해 여러 품번으로 나눠 싣고, Z2-1N 하나에만 십여 종의 샤프가 호환 목록에 올라 있다. 교체용이 하나로 통일돼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니 교체용을 살 때는 내 샤프 모델이 호환 목록에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이번 조사에서 펜텔 교체 지우개의 지름과 길이는 공식 페이지에서 확인하지 못했다. 치수보다 호환 목록이 더 믿을 만한 기준이다.

샤프 지우개와 블록 지우개, 이렇게 나눠 쓰면 된다

글씨를 많이 지우는 사람이라면 접촉면이 넓어 압력이 낮은 블록 지우개가 오래 간다. 샤프 지우개는 한두 글자를 고치는 응급용으로 두는 쪽이 합리적이다. 반대로 촘촘한 글씨 사이에서 한 글자만 지워야 한다면 작은 접촉면이 오히려 장점이다. 그런 용도라면 빨리 닳는 건 값으로 치를 만하다.

샤프로 필기하고 지울 일이 거의 없는 사람에게는 이 고민 자체가 필요 없다.

이 글의 계산은 지름 3.6mm짜리 지우개 하나에서 시작해 압력 20배까지 왔다. 다음으로 궁금한 건 지우개가 끝까지 닳고 나면 어떤 부품이 종이에 닿는지, 그걸 막는 설계가 있는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