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노트를 뜯어서 젤펜을 올렸더니 잉크 선 가장자리가 실처럼 갈라졌다. 지난 노트와 같은 가격대인데 이게 왜 이러지. 포장을 확인하니 80gsm. 지난 노트도 80gsm이었다. 무게가 같으면 같아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지 않다. 평량은 종이 무게만 나타낸다. 표면 처리는 별도다. 이 글이 답하는 질문은 하나다: 같은 평량의 노트인데 번짐이 다른 이유가 뭔가.
퍼짐과 번짐, 두 현상은 원인이 다르다
번짐이라고 묶어서 부르지만 실제로는 두 현상이 따로 존재한다. 퍼짐(feathering)은 잉크 선 가장자리가 갈라지는 것이고, 번짐(bleed-through)은 잉크가 종이를 뚫고 뒤면까지 나타나는 것이다.
퍼짐은 표면에서 시작한다. 잉크가 종이 섬유에 닿는 순간 모세관 작용으로 섬유를 타고 옆으로 번진다. 섬유 배열이 불규칙할수록, 표면 처리가 부족할수록 퍼짐이 커진다. 번짐은 깊이의 문제다. 잉크가 섬유 사이 틈새를 따라 아래로 침투해 반대면까지 스민다. 평량이 낮거나 섬유가 치밀하지 않은 종이에서 자주 일어난다.
같은 80gsm 노트가 다르게 반응하는 이유는 평량 뒤에 있는 표면 처리 때문이다.
코팅과 사이징, 표면 처리의 두 방식
종이 표면에 잉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결정하는 처리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사이징(sizing)**은 섬유에 발수 성질을 부여하는 처리다. 내부 사이징은 펄프 단계에서 AKD(알킬케텐다이머) 같은 화학제를 섞어 섬유 자체가 잉크를 천천히 흡수하게 만든다. 표면 사이징은 종이를 만든 뒤 전분(starch) 용액을 표면에 도포해 섬유를 결합하고 모세관을 좁힌다. 결과적으로 잉크가 섬유를 타고 옆으로 번지는 속도를 늦춘다.
**코팅(coating)**은 더 적극적인 처리다. 무기 안료(카올린 같은 점토, 탄산칼슘)를 접착제와 섞어 종이 표면에 얇은 층을 만든다. 표면이 매끄러워지고 잉크 흡수가 훨씬 느려진다. 인쇄용 아트지나 반광지가 이 방식이다.
주의할 점이 있다. 코팅이 강할수록 잉크가 표면에 오래 머문다. 만년필 잉크처럼 건조가 느린 잉크를 쓰면 손이 닿았을 때 번질 수 있다. 반광지에 만년필로 쓰고 손을 얹으면 잉크가 그대로 번지는 것이 이 때문이다. 퍼짐과 번짐은 막으면서 건조 속도도 적절히 유지하는 균형점이 노트 종이 설계의 핵심이다.
대표 노트별 표면 처리 비교
공개된 스펙과 제조사 정보를 기준으로 정리한다.
Rhodia(로디아): 80gsm과 90gsm 두 종이 라인을 가진다. 표면 사이징이 적용된 매끄러운 종이로, 만년필 커뮤니티에서 번짐 테스트 기준점으로 자주 쓰인다. 젤펜과 만년필 모두 퍼짐이 거의 없다. 습식 잉크(wet ink)에도 강하다. 단점은 건조가 2~3초 걸린다는 것이다.
Clairefontaine(클레르퐁텐): 90gsm. 로디아의 자매 브랜드로 종이 공급 계열이 같다. 독자적인 캘린더링과 사이징 조합을 적용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표면이 로디아보다 더 유리처럼 매끄럽다. 퍼짐 저항성은 동급 최강 수준이지만 건조는 더 느리다. 스탬프나 형광펜이 잘 안 먹는다는 불만이 여기서 나온다.
Leuchtturm1917(로이히트름): 80gsm 기본 라인은 표면 코팅이 없는 무코팅지다. 제조사는 "fountain pen-friendly"라고 표기하지만 별도의 퍼짐 방지 처리가 없어 습식 만년필에서 미세한 feathering이 나타날 수 있다. 120gsm 버전은 평량 자체로 bleed-through를 막는다. 형광펜은 코팅이 없어 잘 먹힌다.
MD Paper(미도리): 일본산 크림색 종이. 내부 사이징이 적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로디아보다 흡수 속도가 빠르다. 잉크가 빠르게 스며들어 건조가 로디아의 절반 이하다. 건조 속도를 우선시한다면 유리하지만 퍼짐 저항성은 낮은 편이다. 만년필이 종이를 가리는 이유에서 이미 다룬 바 있는 종이 흡수 속도 문제가 여기서도 나온다.
어떤 노트를 골라야 하나
잉크가 느린 만년필(wet nib, 습식 펜촉)이나 번짐에 민감하다면 로디아·클레르퐁텐처럼 표면 사이징이 강한 노트를 고른다. 건조가 느리다는 단점은 감수해야 하고, 형광펜 작업을 함께 한다면 적합하지 않다.
젤펜이나 건조가 빠른 잉크를 주로 쓴다면 코팅보다 평량을 먼저 본다. 80gsm 이상이면 bleed-through는 대부분 잡힌다. 평량이 번짐에 미치는 영향을 함께 읽으면 선택 기준이 더 명확해진다.
형광펜과 함께 써야 한다면 무코팅 노트(Leuchtturm, MD Paper)가 낫다. 코팅이 강한 종이는 형광펜 잉크가 표면을 미끄러진다.
가장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평량만 보는 것이다. 80gsm끼리도 표면 처리 방식이 다르면 잉크 반응이 완전히 달라진다. 노트 포장에 사이징 방식을 표기해 두는 제조사는 거의 없다. 결국 브랜드 이름이 표면 처리의 단서가 된다.

이 결론에 도달하는 데 이틀이 걸렸다. 처음엔 단순한 평량 문제인 줄 알았다. 코팅 이야기가 나오고, AKD 화학식이 나오고, 카올린 입자 크기까지 검색하게 됐다. 효율적인 노트 구매를 위한 10분짜리 조사가 종이 과학 강의가 됐다. 남는 장사인지는 아직 계산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