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마다 다이어리를 산다. 그리고 거의 매년 데일리 플래너를 골랐다. 하루에 한 면씩, 날짜가 큼직하게 박힌 그 두툼한 물건 말이다. 문제는 결과가 늘 똑같다는 것이다. 1월은 빼곡하고, 2월은 듬성듬성해지고, 3월이 되면 대부분의 페이지가 백지다. 게으름이라고 자책하며 다음 해에 또 데일리를 샀다. 올해는 자책하기 전에 잠깐 멈춰서, 이게 정말 의지의 문제인지 아니면 물건 선택의 문제인지 따져보기로 했다.
양식은 지면의 해상도다
플래너의 양식이라는 건 결국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한 면에 며칠을 담을 것인가. 데일리는 한 면에 하루를 담는다. 위클리는 한 면에 이레를 담고, 먼슬리는 한 면에 한 달을 담는다. 같은 크기의 지면을 시간으로 얼마나 잘게 쪼개느냐, 다시 말해 시간의 해상도를 어디에 맞추느냐의 문제다. 해상도가 높을수록, 즉 데일리로 갈수록 하루에 배정된 공간은 넓어지고, 낮을수록 한눈에 보이는 기간은 길어진다. 넓은 공간과 긴 조망은 같은 지면 위에서 서로를
일기용 한 권, 업무용 한 권, 스크랩용 한 권. 노트 세 권을 가방에 넣고 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한 권으로 합치고 싶어진다. 그 욕망에 대한 답은 대체로 두 갈래다. 하나는 링과 구멍의 세계, 시스템 바인더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 뜯어볼 물건이다. 가죽 커버와 고무밴드만으로 노트 여러 권을 묶는 방식, 흔히 트래블러스노트라는 상품명으로 불리는 시스템이다. 설계 철학이 바인더와 정반대라서 나란히 놓고 보면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부품이 세 개뿐인 구조
기본 구조는 의외로 소박하다. 등에 구멍을 낸 커버, 그 구멍을 통과하는 고무밴드, 밴드에 등이 걸리는 얇은 제본 노트, 이른바 리필. 리필을 가운데에서 펼쳐 밴드에 끼우면 장착은 그걸로 끝이다. 구멍도 링도 접착제도 필요 없다. 리필을 더 걸고 싶으면 보조 밴드를 하나 더 넣어서 두 권, 세 권을 나란히 묶으면 된다. 180도로 펼쳐지는 제본 방식의 말을 빌리면, 리필 각각은 중철이든 사철이든 원래의 펼침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헌책방에서 같은 연대의 책 두 권을 만졌다. 한 권은 페이지 모서리가 누렇게 바스라져 가루를 남겼고, 다른 한 권은 종이가 그저 미색일 뿐 멀쩡했다. 나이는 같은데 노화가 다르다. 책의 팔자를 가른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는데, 답은 종이의 산도였다. 이 이야기가 헌책방 취미가 없는 사람에게도 상관있는 이유는, 지금 쓰는 다이어리가 20년 뒤 어느 쪽 책이 될지를 바로 이 산도가 정하기 때문이다.
산성지, 자기를 파괴하는 종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 대량 생산된 종이는 대부분 산성지다. 목재 펄프를 값싸게 종이로 만드는 과정에서 산성 약품이 쓰였고, 종이에 남은 산은 시간이 지나며 종이의 골격 분자인 셀룰로오스를 가수분해로 야금야금 끊어낸다. 사슬이 짧아진 종이는 누렇게 변하고 유연성을 잃다가 결국 만지면 부서진다.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종이가 제 몸에 지닌 산으로 스스로를 소화하는 구조라서, 서늘한 서고에 고이 모셔둬도 진행 자체는 멈추지 않는다. 도서관들이 20세
문구점에서 6공 속지를 사 왔고, 집의 6공 바인더에 끼우려다 멈췄다. 구멍이 링과 만나지를 않는다. 여섯 개 대 여섯 개인데 서로 완전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환불하러 가기 전에 원인을 알아야 재발을 막을 수 있으니, 시스템 다이어리의 규격 지도를 한번 그려보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6공은 규격 이름이 아니라 그저 구멍 개수일 뿐이다.
같은 6공, 다른 좌표
시스템 다이어리의 구멍 배열은 판형에 종속된다. A5 6공, 바이블 6공, 미니 6공은 저마다 용지 크기가 다르고 구멍 여섯 개의 간격 배열도 다르다. 공통 패턴은 3+3이다. 위쪽에 세 구멍, 아래쪽에 세 구멍이 몰려 있고 가운데는 비어 있는 형태인데, 그 묶음 사이 거리와 묶음 내 간격이 판형마다 미묘하게 다르게 설계돼 있다. 그래서 바이블 6공 속지는 A5 6공 바인더의 링 위에 아예 올라가지도 못한다. 내 사고의 원인도 정확히 이것이었다. 바인더는 A5였고 사 온 속지는 바이블 판형이었는데, 포장에는 둘
노트의 왼쪽 페이지에 쓸 때마다 오른손이 두 가지 일을 한다. 쓰는 일, 그리고 자꾸 닫히려는 페이지를 누르는 일. 문진을 올려놓고 쓰다가 문득 억울해졌다. 어떤 노트는 펼치면 얌전히 펴져 있는데 이 노트는 왜 자꾸 저항하는 걸까. 답은 표지도 종이도 아닌 등에 있었다. 제본 방식의 족보를 따라가 보면 "180도 펼침"이라는 광고 문구의 실체도 함께 보인다.
펼침의 물리, 등이 휘느냐
책이 펼쳐진다는 것은 등 부분이 바깥쪽으로 휘어준다는 뜻이다. 등이 딱딱하면 페이지들이 등에서 부채꼴로 일어서고, 안쪽 페이지는 계곡처럼 말려 들어간다. 손으로 눌러야 하는 노트가 바로 그 상태다. 그러니 펼침성은 종이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등을 무엇으로, 어떻게 묶었는가가 전부를 결정한다.
제본 방식 네 가지의 구조
중철, 그러니까 스테이플 제본은 종이를 반 접어 가운데를 철심으로 박는다. 등이라 할 것이 없어서 완전히 펼쳐진다. 다만 접는 구조라 두께에 한계가 있어서, 수십 장
젤펜 글 끝에서 예고한 숙제를 하러 왔다.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 때 종이 쪽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발단은 노트 쇼핑몰의 후기였다. "만년필에는 무조건 100gsm 이상"이라는 문장이 상식처럼 반복되고 있었는데, 평량은 종이 1제곱미터의 무게일 뿐이다. 무게가 무거우면 안 비친다는 게 정말일까. 스펙 자료를 모아 따져봤더니 절반만 맞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런 절반짜리 상식이야말로 이 책상이 좋아하는 먹잇감이다.
용어부터, 비침과 번짐은 다른 사건이다
후기들이 "비친다"로 뭉뚱그리는 현상은 사실 둘이다. 비침(show-through)은 뒷면 글씨가 종이를 투과해 어른거리는 것으로 빛의 문제고, 번짐(bleed-through)은 잉크가 종이를 뚫고 뒷면까지 도달하는 것으로 침투의 문제다. 원인이 다르면 처방도 달라야 하는데, 둘을 섞어 부르는 순간 "두꺼운 종이 사면 해결"이라는 절반짜리 답이 태어난다.
평량은 무게 지표다, 차폐 지표가 아니라
평량(gsm)은 말 그대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산 노트가 있다. 첫 페이지를 쓰는데 어딘가 갑갑했다. 자세히 보니 내 글씨가 줄을 자꾸 넘어가서, 받침이 아랫줄을 침범하고 있었다. 표지를 보고 골랐지 줄간격을 보고 고르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인데, 그날 밤 줄간격 규격이라는 것을 검색하게 됐다. 새벽 1시에 종이 규격 표를 읽는 사람이 또 되고 만 것이다. 당신도 서랍 어딘가에 "예쁜데 이상하게 안 손이 가는 노트"가 한 권쯤 있지 않은지. 범인은 아마 줄간격이다.
줄간격에도 족보가 있다
유선 노트의 줄간격은 대충 정해지지 않았다. 미국 기준으로 와이드 룰이 약 8.7mm, 칼리지 룰이 약 7.1mm, 내로우 룰이 약 6.4mm로 규격화되어 있고, 국내 노트는 브랜드에 따라 대체로 6~8mm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문구점에서 "대학노트"라 불리는 물건의 줄간격이 브랜드마다 미묘하게 다른 이유가 여기 있다. 각자 다른 족보를 따르는 것이다.
한글은 줄을 더 잡아먹는다
여기서 변인이 하나 늘어난다.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