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 지난주 페이지를 오늘 아침에 다시 펼쳤다. 손끝으로 종이를 쓸어보니 글씨 자리마다 오톨도톨한 골이 만져졌다. 볼펜으로 힘주어 쓴 자국이 그대로 눌려 박힌 것이다. 당신 다이어리에도 이렇게 눌린 자국이 한 페이지쯤 있을 것이다.

평량이 낮으면 자국이 남고 높으면 안 남는다는 말을 여기저기서 봤는데, 종이가 얇아서 그런가 싶어 포장을 뒤져 확인한 평량은 90gsm이었다. 딱히 낮은 숫자가 아니다. 종이 1제곱미터의 무게를 뜻하는 이 숫자가 볼펜 자국, 눌려서 생기는 자국이라는 뜻의 인덴테이션과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스펙 자료를 뒤져 확인했다.

모눈노트에 볼펜으로 글씨를 눌러쓰는 손을 위에서 내려다본 흑백 사진
볼펜은 촉 끝에 힘이 몰리는 필기구다

볼펜 자국(인덴테이션)은 왜 생기는가

볼펜 자국은 잉크가 아니라 압력이 만든다. 볼펜은 촉 끝의 작은 볼이 구르면서 잉크를 종이에 옮기는 구조라, 젤펜이나 만년필보다 필기 시 힘이 한 점에 몰린다(볼펜 볼 원리에서 이 볼이 어떻게 구르는지 다룬 적이 있다). 이 힘이 종이 섬유를 국소적으로 눌러 오목하게 변형시킨 흔적이 자국이다.

이건 비침(고스팅)과는 아예 다른 현상이다. 비침은 잉크가 섬유 틈을 타고 반대 면으로 배어 비쳐 보이는 광학적 문제고, 자국은 섬유 자체가 압력에 눌리는 물리적 문제다. 평량과 비침의 관계를 따져봤을 때 평량이 비침의 절반만 설명한다고 확인했는데, 자국 쪽 사정도 비슷하게 복잡하다.

종이 단면에 볼펜 촉이 눌러 홈이 파이는 모습과 잉크가 반대 면으로 비쳐 보이는 모습을 나란히 비교한 그림
자국(인덴테이션)과 비침(고스팅)의 차이 모식도

평량(gsm)이 높을수록 자국이 덜 남는 이유

평량이 높을수록 자국이 얕아지는 경향은 실측 테스트로도 나온다. 한 다이어리 리뷰 사이트가 80·120·140·160·180gsm 종이에 같은 필기구로 눌러 쓴 결과를 공개했는데, 120gsm에서는 자국과 약간의 비침이 남았고 140gsm부터는 대체로 사라졌으며 160gsm 이상에서는 자국도 비침도 거의 보고되지 않았다. 평량이 높을수록 압력을 흡수할 섬유층이 두꺼워지기 때문이다.

노트 브랜드별 평량을 한 표로 모아 보다가 이번에도 스프레드시트를 열고 말았다. 습관은 못 속인다. 만년필 노트로 유명한 토모에리버는 52gsm(두꺼운 버전도 68gsm)에 불과하고, 몰스킨 클래식 노트는 70gsm, 로디아 스테이플바운드와 로이히트투름1917의 기본 노트는 나란히 80gsm이다. 로디아 웹노트북은 90gsm, 로이히트투름1917 마스터는 100gsm까지 올라가고, 몰스킨 스케치 앨범은 120gsm, 스케치북은 165gsm이다. 같은 "노트"라는 이름 아래 평량이 세 배 넘게 벌어져 있다.

가벼움에서 무거움까지 평량 축 위에 토모에리버·몰스킨·로디아·로이히트투름 등 노트 브랜드를 배치하고 자국 위험·경계·안전 구간을 색으로 나눈 그림
노트 평량 스펙트럼과 자국 위험 구간 모식도

평량이 같아도 자국이 다르게 남는 이유, 받침의 역할

같은 90gsm이라도 자국 깊이는 아래에 뭘 깔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딱딱한 책상 위에 종이 한 장만 놓고 눌러 쓰면 압력이 그대로 전달되지만, 아래에 여러 장이 깔려 있거나 쿠션이 있는 데스크매트가 받쳐 주면 압력이 분산돼 자국이 얕아진다. 다이어리 뒤쪽 페이지일수록 자국이 잘 안 남는 이유도 이거다. 남은 페이지 수십 장이 통째로 받침 노릇을 한다.

필압도 사람마다 다르다. 같은 90gsm, 같은 받침이어도 눌러쓰는 손과 가볍게 쓰는 손은 결과가 다르다. 평량 숫자 하나로 자국 유무를 예측하려 한 게 애초에 무리였다(숫자를 믿었다가 배신당한 기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래서 자국 안 남는 노트는 어떻게 고르나

필압이 센 편이면 100gsm 이상에 페이지 수가 많은 노트를 고르는 편이 안전하다. 두께 자체가 받침 노릇을 해 주기 때문이다. 필압이 가벼운 사람은 70·80gsm도 자국 걱정 없이 쓸 수 있고, 그래도 불안하면 노트보다 아래 데스크매트나 클립보드를 바꾸는 쪽이 더 빠른 해결이다. 어차피 한 면만 쓰고 뒷장을 확인할 일이 없다면, 이 자국은 애초에 걱정할 이유가 없는 문제다.

평량 표를 정리하다 보니 다음으로 궁금해진 건 노트 표지 두께다. 표지가 두꺼울수록 맨 뒷장 자국도 줄어들지, 이건 다음에 확인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