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도 없이 나갔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난 적이 있다. 가방 속 작은 수첩은 다행히 젖지 않았는데, 표지 안쪽을 보니 작은 글씨로 워터프루프라고 적혀 있었다. 종이가 물에 안 젖는다는 게 말이 되나 싶어서 뒤늦게 찾아봤다.
찾아보니 방수 노트라는 이름 아래 실제로는 서로 완전히 다른 물건들이 섞여 있었다. 어떤 건 종이에 코팅만 입힌 것이고, 어떤 건 아예 종이가 아니었다. 타이벡이나 스톤페이퍼처럼 원료 자체가 플라스틱과 광물인 소재도 있는데, 이름은 같은 방수라도 원리도 필기감도 완전히 다르다.

방수 노트, 종이인데 왜 물에 안 젖나
일반 종이는 펄프 섬유 사이 빈틈으로 물이 스며들어 젖고, 심하면 찢어진다. 방수 노트가 젖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종이 표면에 물을 튕겨내는 코팅을 덧입히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물을 흡수하지 않는 소재로 종이 자체를 대체하는 방식이다.
라이트인더레인 같은 제품이 앞쪽에 해당한다. 나무 펄프로 만든 보통 종이에 특수 코팅을 입혀서 빗방울이 스며들기 전에 겉면에서 굴러떨어지게 만든다. 코팅 여부가 잉크 흡수 속도를 바꾸는 것과 원리가 비슷한데, 방수 코팅은 그 반응을 물 쪽으로 확장한 셈이다. 타이벡과 스톤페이퍼는 뒤쪽에 해당한다. 종이라는 이름을 쓰지만 원료부터 나무 펄프가 아니다.
타이벡과 스톤페이퍼, 원료부터 다르다
타이벡은 듀폰이 만든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섬유를 열과 압력으로 압착해서 만든 부직포다. 실 같은 가는 섬유를 무작위로 얽어 놓은 구조라, 액체는 막으면서도 수증기는 통과시킨다(그래서 방수와 투습을 동시에 챙기는 건축 자재로도 쓰인다). 섬유 자체가 물을 밀어내기 때문에 표면에 따로 코팅을 얹을 필요가 없고, 찢거나 뚫으려 해도 잘 버틴다.
스톤페이퍼는 접근이 아예 다르다. 석회석이나 대리석을 갈아 만든 탄산칼슘 가루가 전체 원료의 80% 정도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이 가루를 결합해 시트로 굳히는 HDPE 수지 18%와 소량의 코팅 성분이다. 종이라기보다는 얇은 돌가루 판에 가깝다. 표면이 삶은 계란 속껍질처럼 매끈해서 물이 스밀 틈 자체가 없다. 다만 밀도가 일반 종이보다 높은 편이라(1.0~1.6g/㎤) 같은 두께라도 더 묵직하게 느껴진다.
방수 노트에서 유독 젤펜이 잘 안 써지는 이유
방수 노트를 처음 쓰는 사람들이 가장 자주 부딪히는 문제가 필기구 궁합이다. 볼펜이나 연필은 잘 써지는데 젤펜은 유독 뭉치고 잘 안 마른다는 반응이 많다. 이유는 잉크가 마르는 방식 자체에 있다.
유성 잉크와 수성 잉크는 점도부터 마르는 방식까지 다른데, 일반 종이 위에서는 그 차이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종이가 어느 쪽 잉크든 어느 정도는 흡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수 노트 표면은 애초에 흡수를 막도록 설계돼 있다. 볼펜의 유성 잉크는 점도가 높아서 표면에 바로 눌러 붙듯 굳고, 연필 흑연은 흡수와 무관하게 표면에 긁혀 남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반면 젤펜과 수성 마카는 물 기반 잉크가 표면에서 흡수되지 못한 채 그대로 고여 있다가, 마르기도 전에 손이 스치면 그대로 번진다.
그래서 어떤 방수 노트를 골라야 하나
야외 작업이나 캠핑처럼 완전한 방수가 필요하다면 타이벡이나 스톤페이퍼 쪽이 맞다. 물에 젖어도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의 방수력을 기대할 수 있는데, 대신 필기구는 반드시 유성 볼펜이나 연필로 맞춰야 한다.
가방 속에서 잠깐 비를 맞는 정도라면 코팅 종이로도 충분하다. 라이트인더레인류는 완전 방수는 아니지만 순간적인 물기는 잘 튕겨내고, 일반 종이에 가까운 필기감이라 젤펜도 무리 없이 쓸 수 있다. 반대로 실내 책상에서만 쓰는 다이어리라면 방수 소재를 고를 이유가 없다. 방수 노트는 대부분 일반 종이보다 두껍고 비싸며, 무엇보다 표면이 매끈해서 잉크 종류를 가리는 불편함이 방수라는 장점보다 더 크게 느껴질 수 있다.
방수 노트 하나 찾아보겠다고 탄산칼슘 함량까지 뒤지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나니 좀 우스웠다. 다음엔 젤펜이 왜 하필 방수 표면에서만 이렇게 말썽인지, 잉크 성분 쪽을 더 파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