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뭉치를 정리하다가 검지 옆이 베였다. 칼도 아니고 종이 한 장이었다. 그런데 화끈거리는 정도가 며칠 전 커터칼에 살짝 스쳤을 때보다 오래갔다. 더 무딘 물건한테 더 오래 시달리는 게 어이가 없어서 검색창을 열었다. 종이는 왜 이렇게 아프게 베나.
찾아보니 종이 베임을 다룬 물리학 연구가 실제로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종이는 아무 두께나 잘 베이는 게 아니라, 유독 잘 베이는 두께 구간이 따로 있다. 얇은 종이도, 두꺼운 종이도 의외로 안전한 쪽에 가깝다.
종이 베임이 칼에 베이는 것보다 아픈 이유
종이 가장자리는 매끈해 보여도 현미경으로 보면 톱니처럼 울퉁불퉁하다.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 물리학 상담 코너(Physics Van)는 이 점을 명확히 짚는다. 무딘 날은 날카로운 칼날보다 조직에 더 많은 미세한 찢김을 남기고, 그 찢김이 통증을 오래 끈다는 것이다. 한 번 매끈하게 베이는 대신 톱니에 여러 번 걸려 뜯기는 셈이다.
여기에 종이 성분(표백 과정에 쓰인 화학물질
회의실에서 만년필을 꺼냈다가 조용히 다시 넣었다. 회사 복사지 위에서 내 글씨가 수염 난 얼룩으로 변하는 걸 봤기 때문이다. 같은 펜이 집의 노트에서는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게 구르는데, 종이가 바뀌자 완전히 다른 도구가 되어버렸다.
만년필이 종이를 가리는 이유부터 말하면, 잉크를 다른 필기구보다 훨씬 많이 쏟아내는 도구라서다. 그래서 종이의 약점이 페더링, 번짐, 비침이라는 세 가지 문제로 그대로 드러난다. 이 글은 세 현상의 원인을 나눠서 정리하고, 만년필에 맞는 종이를 확인하는 법과 안 맞는 종이에서 버티는 법까지 다룬다.
만년필 잉크가 유독 많이 나오는 이유
출발점은 잉크 방출량이다. 볼펜의 유성 잉크가 끈적한 잉크를 볼로 조금씩 굴려 바르는 방식이라면, 만년필은 묽은 수성 잉크를 모세관 현상으로 흘려보내는 방식이다. 단위 길이당 종이에 도달하는 액체의 양이 필기구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다.
그래서 볼펜이 아무 종이에서나 무난한 반면, 만년필은 종이의 모든 약점을 사정없
헌책방에서 같은 연대의 책 두 권을 만졌다. 한 권은 페이지 모서리가 누렇게 바스라져 가루를 남겼고, 다른 한 권은 종이가 그저 미색일 뿐 멀쩡했다. 나이는 같은데 노화가 다르다.
두 책의 운명을 가른 것은 종이의 산도다. 산이 남아 있는 산성지는 스스로를 분해하며 부서지고, 산을 없앤 중성지는 수백 년을 버틴다. 이 글은 산성지가 부서지는 이유와 중성지의 원리, 그리고 오래 남길 기록에 맞는 종이 고르는 법을 정리한다. 헌책방 취미가 없어도 상관있는 이야기다. 지금 쓰는 다이어리가 20년 뒤 어느 쪽 책이 될지를 이 산도가 정하기 때문이다.
산성지가 시간이 지나면 부서지는 이유
산성지는 종이에 남은 산이 종이 자신을 분해하기 때문에 부서진다.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제 몸에 지닌 산으로 스스로를 소화하는 구조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 대량 생산된 종이는 대부분 산성지다. 목재 펄프를 값싸게 종이로 만드는 과정에서 산성 약품이 쓰였고, 종이에 남은 산은 시간이
내 얇은 사전에 형광 줄을 그었더니 뒷장의 단어 세 개가 노란 배경을 얻어버렸다. 앞장을 강조했는데 뒷장이 멋대로 편집된 것이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 이야기는 아니다. 빌린 책에 형광펜을 긋는 건 그 자체로 범죄니까.)
얇은 종이에서 형광펜이 사고를 내는 원인은 두 가지다. 잉크가 종이를 뚫고 스며드는 번짐, 그리고 색이 뒷면까지 보이는 비침. 이 글은 그 원인을 정리하고, 뒷면을 지키는 대안 세 가지(고체 형광펜, 파스텔 형광펜, 드라이 하이라이터)를 스펙 기준으로 비교한다.
형광펜이 뒷면까지 비치는 이유
형광펜이 뒷면을 망치는 경로는 두 갈래다. 첫째, 형광펜은 잉크를 많이 쏟는 도구다. 넓은 칩으로 면을 칠하는 구조라 필기구 중에서도 단위 면적당 잉크 방출량이 가장 많은 축인데, 수성 잉크가 이 정도 양으로 들어오면 사전지 같은 얇은 종이는 그냥 뚫려버린다. 이게 번짐이다. 둘째, 용케 안 뚫려도 문제가 남는다. 형광색은 빛을 더해 내보내는 색이라 존재감이 워낙 강해서
발단은 노트 쇼핑몰의 후기였다. "만년필에는 무조건 100gsm 이상"이라는 문장이 상식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평량은 종이 1제곱미터의 무게일 뿐인데, 무게가 무거우면 정말 안 비칠까.
스펙 자료를 모아 따져본 결론부터 말하면,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비침을 정하는 것은 무게가 아니라 불투명도고, 번짐을 막는 것은 사이징이라는 표면 처리다. 이 글은 비침과 번짐이 왜 다른 현상인지부터 안 비치는 노트를 고르는 기준까지 정리한다. 젤펜 글 끝에서 예고한 숙제이기도 하다. 이런 절반짜리 상식이야말로 이 책상이 좋아하는 먹잇감이다.
비침과 번짐, 서로 다른 현상이다
후기들이 "비친다"로 뭉뚱그리는 현상은 사실 둘이다. 비침(show-through)은 뒷면 글씨가 종이를 투과해 어른거리는 것으로 빛의 문제고, 번짐(bleed-through)은 잉크가 종이를 뚫고 뒷면까지 도달하는 것으로 침투의 문제다.
원인이 다르면 처방도 달라야 하는데, 둘을 섞어 부르는 순간 "두꺼운 종이 사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