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산 노트가 있다. 첫 페이지를 쓰는데 어딘가 갑갑했다. 자세히 보니 내 글씨가 줄을 자꾸 넘어가서, 받침이 아랫줄을 침범하고 있었다. 표지를 보고 골랐지 줄간격을 보고 고르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인데, 그날 밤 줄간격 규격이라는 것을 검색하게 됐다. 새벽 1시에 종이 규격 표를 읽는 사람이 또 되고 만 것이다. 당신도 서랍 어딘가에 "예쁜데 이상하게 안 손이 가는 노트"가 한 권쯤 있지 않은지. 범인은 아마 줄간격이다.

줄간격에도 족보가 있다

유선 노트의 줄간격은 대충 정해지지 않았다. 미국 기준으로 와이드 룰이 약 8.7mm, 칼리지 룰이 약 7.1mm, 내로우 룰이 약 6.4mm로 규격화되어 있고, 국내 노트는 브랜드에 따라 대체로 6~8mm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문구점에서 "대학노트"라 불리는 물건의 줄간격이 브랜드마다 미묘하게 다른 이유가 여기 있다. 각자 다른 족보를 따르는 것이다.

줄간격 6·7·8mm 와 한글 글씨 높이의 관계 모식도
줄간격과 글씨 높이의 관계 모식도

한글은 줄을 더 잡아먹는다

여기서 변인이 하나 늘어난다. 문자다. 로마자는 소문자 위아래로 여백이 넉넉한 구조라 7mm 칼리지 룰에서 편안하게 논다. 한글은 사정이 다르다. 받침까지 쌓아 올리는 정방형 문자라서 같은 글자 크기라도 세로 공간을 더 쓴다. 로마자 기준으로 설계된 줄간격에 한글을 쓰면 체감이 더 빽빽해지는 데는 이런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그래서 같은 6mm 노트가 영어 단어장으로는 촘촘하고 경제적인 물건이 되고, 받침 많은 한글 문장 앞에서는 아랫줄을 침범당하는 물건이 된다. 노트가 나쁜 게 아니다. 문자와 규격의 궁합이 안 맞았을 뿐이다.

펼쳐진 유선 노트와 만년필
유선 노트, 줄간격이 곧 사용감이다

줄간격이 바꾸는 세 가지

공개 규격과 통용되는 경험칙을 합치면 줄간격은 적어도 세 가지를 바꾼다. 우선 정보 밀도. 6mm 노트는 8mm 노트보다 같은 페이지에 세 줄쯤 더 들어가니 회의록처럼 분량이 긴 기록에 유리하다. 다음은 글씨 크기의 강제인데, 줄이 좁으면 손이 알아서 글씨를 줄인다. 자기 글씨의 자연스러운 크기보다 작게 쓰는 시간이 길어지면 손에 힘이 들어간다. 마지막으로 다시 읽을 때의 가독성. 줄간격은 인쇄물의 행간과 같은 역할이라, 빽빽한 페이지는 쓸 때가 아니라 읽을 때 비용을 청구해 온다.

말하자면 좁은 줄간격은 "쓰는 날의 효율"을 주고 "읽는 날의 피로"를 받아 가는 거래다. 체감에는 줄의 색과 굵기도 관여한다. 같은 7mm라도 진한 회색 실선 노트와 옅은 도트 라인 노트는 갑갑함이 다르다. 진한 줄은 글씨와 시각적으로 경쟁해서 페이지를 더 빽빽해 보이게 하고, 옅은 줄은 쓸 때만 보이고 읽을 때는 물러난다. 줄간격 숫자가 같은데 어떤 노트만 유난히 답답했다면 범인은 간격이 아니라 줄 자체였을 가능성이 있다.

자기 줄간격을 찾는 법

기준은 의외로 간단하다. 평소처럼 쓴 자기 글씨의 높이를 재보면 된다. 받침 있는 글자 기준으로 글씨 높이의 1.5배 안팎이 편안한 줄간격이라는 것이 통용되는 경험칙이다. 글씨 높이가 5mm면 7~8mm 줄이 맞고, 4mm 아래로 작게 쓰는 사람이라면 6mm도 여유롭다. 내 글씨를 재보니 5.5mm였다. 6mm 노트에서 갑갑했던 것은 취향 문제가 아니라 산수 문제였던 셈이다. 문제가 산수로 판명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 산수는 고칠 수 있으니까.

물론 이 기준이 필요 없는 사람도 있다. 무지 노트나 도트 노트를 쓰는 사람에게 줄간격은 남의 이야기고, 글씨 크기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사람은 규격에 자기를 맞추면 그만이다. 이 글은 노트에 글씨를 맞추는 사람이 아니라 글씨에 노트를 맞추고 싶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노트를 고를 때 표지 다음에 볼 것은 종이 색도 제본도 아니고 줄간격 숫자라는 것, 그리고 자기 글씨 높이를 한 번만 재두면 그 숫자 하나로 매대의 절반을 걸러낼 수 있다는 것. 오늘의 수확은 이 두 줄이다. 표지에 반해서 산 6mm 노트는 영어 단어장이 됐다. 나름의 해피엔딩이라고 기록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