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용 한 권, 업무용 한 권, 스크랩용 한 권. 노트 세 권을 가방에 넣고 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한 권으로 합치고 싶어진다. 그 욕망에 대한 답은 대체로 두 갈래다. 하나는 링과 구멍의 세계, 시스템 바인더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 뜯어볼 물건이다. 가죽 커버와 고무밴드만으로 노트 여러 권을 묶는 방식, 흔히 트래블러스노트라는 상품명으로 불리는 시스템이다. 설계 철학이 바인더와 정반대라서 나란히 놓고 보면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부품이 세 개뿐인 구조
기본 구조는 의외로 소박하다. 등에 구멍을 낸 커버, 그 구멍을 통과하는 고무밴드, 밴드에 등이 걸리는 얇은 제본 노트, 이른바 리필. 리필을 가운데에서 펼쳐 밴드에 끼우면 장착은 그걸로 끝이다. 구멍도 링도 접착제도 필요 없다. 리필을 더 걸고 싶으면 보조 밴드를 하나 더 넣어서 두 권, 세 권을 나란히 묶으면 된다. 180도로 펼쳐지는 제본 방식의 말을 빌리면, 리필 각각은 중철이든 사철이든 원래의 펼침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이 시스템에 합류하는 셈이다. 링 노트처럼 손에 걸리는 금속도 없고, 무선 제본처럼 뻣뻣한 등도 없다.
바인더와 벌이는 구조 대결
여러 권을 하나로 합친다는 같은 문제에 대한 두 가지 답을 나란히 놓고 보면 갈림길이 꽤 선명하게 드러난다. 재배열의 단위부터 다르다. 바인더는 낱장 단위로 움직이고 밴드 시스템은 권 단위로만 움직인다. 페이지 한 장을 옮기는 자유는 바인더가 압도적으로 유리하고, 밴드 쪽은 일기 리필을 통째로 새것으로 바꾸는 정도의 운용만 가능하다. 필기감에서는 반대로 밴드 시스템이 이긴다. 링이 없으니 왼쪽 페이지에 손이 걸릴 일이 없고, 리필 자체가 얇아서 어디를 펼치든 평평하게 눕는다. 규격의 개방성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밴드 시스템은 사실상 열린 규격에 가깝다. 밴드에 걸리는 크기라면 어떤 노트든 리필로 쓸 수 있어서, 시판 리필 대신 마음에 드는 평량의 노트를 직접 끼우거나 자작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바인더가 겪는 구멍 배열의 호환성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구조인 셈이다. 다만 판형, 그러니까 레귤러냐 패스포트냐는 결국 커버에 종속되니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하긴 어렵다.

밴드에도 상한은 있다
확장에는 물리적 한계가 따른다는 말도 적어둔다. 밴드의 장력과 커버의 폭이 수용량을 결정하는데, 실사용자들 사이에 통용되는 감각으로는 리필 서너 권 언저리가 쾌적하게 쓸 수 있는 상한이다. 그 이상 욱여넣으면 커버가 벌어지고, 밴드는 늘 한계에 가까운 장력으로 일해야 하니 고무 자체가 빨리 삭는다. 스프링이 반복된 변형에 지쳐 늙어가듯 고무밴드도 마모의 방식만 다를 뿐 결국은 소모품이다. 다행인 점은 교체가 쉽다는 것이다. 여분 밴드를 사서 갈아 끼우면 그만이다. 노트 뭉치가 무거워지면 애초에 한 권으로 다 들고 다니자는 이 시스템의 존재 이유 자체가 흔들린다. 권수가 늘어날 조짐이 보이면 리필 두 권을 하나로 합치거나, 철 지난 리필은 따로 보관하는 동선으로 은퇴시키는 편이 낫다.
누구의 가방에 맞나
이 시스템이 맞는 사람은 용도가 두세 갈래로 딱 떨어지는 사람이다. 일기와 업무와 스크랩처럼 권 단위로 삶이 나뉜다면, 필기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한 권처럼 들고 다닐 수 있다. 낱장 단위의 재배열이 자주 필요하다면 바인더 쪽이 맞고, 애초에 용도가 하나뿐이라면 잘 만든 단권 노트 하나가 가장 싸고 가볍다. 이 시스템 특유의 함정도 하나 짚어둔다. 커버가 예쁘면 그 커버를 채우려고 없던 용도를 만들어내는 역전이 종종 일어난다. 도구가 일감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면, 그건 이미 다른 장부에 적어야 할 취미의 영역이다.
결국 노트 세 권은 커버 하나로 합쳐졌다. 오늘 자 일기 리필 첫 줄에는 이 블로그에서 다음에 써볼 만한 글감 몇 개를 적어두었다. 그 목록을 다 쓰기 전에는 새 커버를 살 일도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