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에 스탬프를 찍고 바로 다음 장으로 넘겼다가, 앞장에 잉크가 그대로 옮겨붙은 적이 있다. 어떤 날은 손끝으로 문질러도 안 번지는데 어떤 날은 몇 분이 지나도 여전히 미끈거린다. 같은 스탬프대인데 왜 이렇게 마르는 속도가 다른가 싶어서 검색창을 열었다.

답은 스탬프대 안에 있었다. 스탬프 잉크는 크게 안료 잉크와 염료 잉크 두 갈래로 나뉘는데, 색소가 종이에 자리 잡는 방식 자체가 달라서 마르는 속도도, 어울리는 종이도, 어울리는 기법도 함께 갈린다. 제조사 공개 자료를 기준으로 이 둘의 차이를 정리했다.

나무 손잡이 스탬프로 찍은 꽃무늬 도장이 흰 봉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스탬프로 찍은 도장, 잉크가 다 마른 상태

안료 잉크와 염료 잉크, 마르는 속도가 왜 다른가

두 잉크의 마르는 속도 차이는 색소가 어디에 자리 잡느냐에서 갈린다. 염료 잉크는 색소가 액체 속에 녹아 있는 형태라 종이 섬유 속으로 스며들고, 스며드는 만큼 빨리 마른다. 반대로 안료 잉크는 색소가 고체 입자 상태로 액체에 떠 있는 형태라 종이에 스며들지 못하고 표면 위에 얹힌 채로 남는다.

Ranger Ink는 이 차이를 안료 잉크가 "더 오래 젖어 있는 상태를 유지한다"고 설명한다. 얹혀 있는 색소가 마르려면 용매가 표면에서 증발할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이 곧 손에 묻는 시간이다. 사무실 결재란에 흔히 놓인 빨간 스탬프대는 대개 염료 잉크고, 문구점에서 파는 카드 꾸미기용·엠보싱용 잉크패드는 안료 잉크인 경우가 많다.

염료 잉크는 색소가 종이 두께 전체에 스며들고 안료 잉크는 입자가 표면에만 남는 구조를 비교한 그림
염료 잉크·안료 잉크 흡수 방식 비교 모식도

엠보싱 스탬프에는 왜 꼭 안료 잉크를 쓰는가

엠보싱 기법이 안료 잉크를 고집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엠보싱 파우더는 젖은 잉크 위에 뿌려서 붙이고 열로 녹여 굳히는 방식인데, 염료 잉크처럼 순식간에 마르면 파우더를 뿌릴 틈이 없다. Ranger Ink 도 안료 잉크가 젖은 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성질을 엠보싱의 조건으로 명시한다. (마르는 게 늦어서 불편한 잉크가, 알고 보니 누군가에게는 그 늦음이 핵심 기능이었다.)

코팅지·매끈한 종이에서 유독 안 마르는 이유

안료 잉크 중에도 빨리 마르는 제품이 있다. 츠키네코의 VersaFine은 오일 베이스 안료 잉크인데, 비코팅 종이 기준으로 3~5초 안에 마른다고 제조사가 밝힌다. 방식은 "흡수 건조"다. 잉크가 종이 섬유 속으로 스며들면서 마르게 설계했다는 뜻인데, 이 방식은 흡수할 섬유가 있어야 성립한다.

그래서 같은 VersaFine이라도 코팅지나 매끈한 표지에서는 흡수될 자리가 없어 마르는 속도가 확 느려진다. 실제로 제조사도 코팅지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못 박는다. 노트 속지 코팅이 잉크 번짐에 미치는 영향 글에서 다룬 것과 같은 구도다. 종이 표면이 잉크를 받아들이느냐가 마르는 속도를 좌우한다. 스탬프 패드 소재에 따라 잉크 흡수·전달량이 갈리는 것도 결국 같은 흡수 논리 위에 있다.

안료 잉크가 무조건 오래간다는 오해

둘의 일반적인 경향은 맞지만 예외가 있다. 염료 잉크는 물에 약하다는 인상이 있는데, Ranger의 아카이벌 잉크는 오일 베이스 염료 잉크로 만들어 마른 뒤에는 방수·번짐 방지 특성을 갖춘다. 산성프리 처리까지 더해 장기 보관용으로 설계됐다.

반대로 안료 잉크는 오래 못 마른다는 인상과 달리, 앞서 본 VersaFine처럼 몇 초 안에 마르는 제품도 있다. 만년필 잉크의 철분·염료 성분 차이를 다뤘을 때도 그랬듯, 잉크는 분류 하나로 성능을 단정할 수 없는 물건이다. 안료냐 염료냐보다 제품 설명에 적힌 건조 방식과 궁합 종이를 확인하는 편이 실제로는 더 정확하다.

그래서 다이어리 꾸미기엔 어떤 잉크를 쓰나

결론은 용도에 달렸다. 다이어리 여러 장을 빠르게 넘기며 찍는 용도라면 염료 잉크나 VersaFine 같은 속건 안료 잉크가 편하고, 입체감 있는 엠보싱 효과를 노린다면 일반 안료 잉크가 맞는 선택이다. 서류에 도장처럼 자주 찍고 물이나 손 마찰에 노출될 일이 많다면 방수 표기가 있는 제품을 따로 확인해야 한다. 코팅된 스티커 용지나 필름지 위주로 쓰는 사람에게는 애초에 흡수 건조 방식 잉크 자체가 안 맞을 수 있다는 점도 알아두면 좋다. (이쯤 되면 다이어리 꾸미기가 아니라 잉크 화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자각이 든다.)

여기까지 정리하고 나니 잉크 입자를 나노미터 단위로 비교한 논문까지 검색 결과에 걸려 있었다. 잉크 이야기는 한 번 들어가면 좀처럼 끝을 안 낸다. 오늘 다이어리는 결국 반 장도 못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