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통을 정리하다 보면 롤러볼 펜과 볼펜, 라이너펜이 한 칸에 뒤섞여 있는 걸 자주 본다. 비슷하게 생겼으니 아무 생각 없이 던져 넣었을 텐데, 닙(펜촉) 구조를 뜯어보면 이 셋의 관계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롤러볼과 볼펜은 사실 사촌에 가깝고, 라이너펜은 아예 다른 집안이다.

세 필기구를 볼 유무와 잉크 종류 기준으로 나란히 놓고 구조를 비교하면 필기감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바로 보인다. 어제 밤에 궁금증이 나서 그대로 못 자고 특허 문서와 제조사 자료까지 뒤져 정리했다(제도 펜 하나 사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됐다).

롤러볼 펜과 볼펜, 닙 구조는 얼마나 같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거의 같다. 두 펜 모두 텅스텐카바이드로 만든 작은 볼이 소켓 안에서 회전하며 잉크를 종이에 옮기는 방식이다. 볼이 굴러가며 잉크를 긁어내는 원리는 볼펜 볼 원리 글에서 이미 다뤘다. 두 펜의 차이는 볼 자체가 아니라 그 볼이 만나는 잉크에 있다.

볼포인트는 유성(오일 베이스) 잉크를 쓴다. 점도가 높아서 볼이 굴러갈 때 잉크가 얇게, 천천히 묻어 나온다. 롤러볼은 수성 또는 젤 잉크를 쓰는데 점도가 훨씬 낮다. 그만큼 잉크가 종이에 더 깊이, 더 많이 스며든다. 제조사 자료를 종합하면 롤러볼 잉크는 표준 종이 기준 1~3초 안에 마르는데, 이 속도는 점도를 낮춘 대가로 얻은 것이다(대신 잉크 소모는 볼포인트보다 빠르다). 점도가 자릿수 단위로 얼마나 벌어지는지는 젤펜과 유성볼펜의 필기감 차이 글에서 다룬 적이 있다.

볼포인트·롤러볼·라이너펜 세 필기구의 닙 단면을 나란히 놓고 볼 구조와 섬유팁 구조를 비교한 그림
볼펜·롤러볼·라이너펜 닙 구조 비교 모식도

라이너펜은 왜 다른 필기구로 분류될까

라이너펜에는 애초에 볼이 없다. 나일론이나 폴리에스터 섬유를 촘촘하게 압축한 다공성 팁이 심지 역할을 해서, 모세관 현상으로 잉크 저장고에서 종이 표면까지 잉크를 끌어올린다. 등잔불의 심지가 기름을 빨아올리는 원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대충 맞는다.

팁을 이루는 섬유의 기공 크기와 밀도가 선 굵기를 정한다. 제조사 라인업을 보면 파인펜(0.4mm)과 브로드펜(0.8mm)처럼 같은 브랜드 안에서도 팁 밀도를 달리해 굵기를 나눠 파는데, 볼 지름을 바꾸는 볼펜류와는 굵기를 결정하는 지점 자체가 다르다. 뚜껑을 닫아도 팁이 안 마르게 하는 밀폐 설계가 따로 들어가는 것도 볼펜류에는 없는 특징이다.

필압에 따라 선 굵기가 달라질까

라이너펜은 필압을 세게 줘도 선 굵기가 거의 그대로다. 볼 구조가 없으니 눌러도 잉크 배출량이 크게 늘지 않는다(그러니까 라이너펜으로 서명에 멋을 낼 수는 없다는 뜻이다. 힘줘서 눌러봤자 결과는 똑같다). 반대로 볼포인트와 롤러볼은 필압이 늘면 볼이 소켓에 더 세게 눌리면서 잉크가 살짝 더 나온다. 다만 그 차이는 크지 않다. 애초에 볼과 소켓 사이 간극이 좁게 설계돼 있어서, 필압으로 조절할 수 있는 폭 자체가 작다.

흔한 오해 정정, 롤러볼은 젤펜과 같은 걸까

롤러볼과 젤펜을 같은 펜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뿌리는 같아도 잉크 조성이 다르다. 젤펜은 점성이 높은 수성 젤에 안료를 매달아 놓은 잉크를 쓰고, 롤러볼은 그보다 묽은 액체 잉크나 젤 잉크를 쓴다. 유성·수성·중성 세 계열의 조성 차이는 유성 수성 중성 볼펜 차이 글에 정리해 뒀다. 또 하나, 라이너펜을 "가는 볼펜"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건 아예 틀렸다. 볼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필기구다.

스케치북 위에 파란색·빨간색 마커펜 여러 자루가 놓여 있고 종이에는 손으로 그린 와이어프레임 스케치가 보인다
필압과 무관하게 균일한 선을 내는 필기구들

그래서 어떤 펜을 골라야 할까

정교한 선이 필요한 제도나 일러스트라면 라이너펜이 유리하다. 필압을 아무리 줘도 선 굵기가 안 바뀌니 도면이나 레터링에서 예측 가능성이 높다. 부드러운 필기감과 진한 발색을 원한다면 롤러볼이 맞는데, 잉크 소모가 빠르고 번짐에 약하다는 조건은 감안해야 한다. 특히 왼손잡이는 갓 쓴 잉크가 마르기 전에 손이 지나가면서 번질 수 있어 건조 속도를 따로 확인하는 편이 낫다. 휴대성과 범용성, 가격이 우선이라면 볼포인트가 여전히 무난하다.

이미 만년필을 주력으로 쓰는 사람에게는 이 비교가 크게 의미 없을 수도 있다. 만년필은 필압과 각도에 따라 선 굵기가 달라지는 데다 잉크 선택 폭도 훨씬 넓어서, 세 필기구가 나눠 가진 장점을 이미 한 몸에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비교 하나 하려고 특허 문서까지 열어봤다. 원래는 필통 정리나 하려던 참이었는데, 필통은 그대로고 나는 롤러볼 소켓 구조를 알게 됐다. 남는 장사인지는 아직 계산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