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만년다이어리와 날짜인쇄형 비교에서 속지 갈아 끼우는 바인더를 제3의 길이라 불러놓고, 규격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뤘다. 그 숙제를 하려고 쇼핑몰에서 속지 카테고리를 열었더니 옵션이 이렇게 나온다. 미니, 포켓, 바이블, 퍼스널, A6, A5. 문구를 사는데 갑자기 성경이 나오고, 같은 목록 안에서 어떤 이름은 알파벳과 숫자다. 이 명명의 무질서에는 이유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다이어리 속지 규격은 서로 다른 두 계보의 이름이 한 매대에 섞인 것이다. 하나는 종이 표준에서 온 미터법 이름(A5·A6), 하나는 영국 수첩 회사의 관례에서 온 인치 이름(미니·포켓·바이블)이다. 이 글은 판형별 실제 치수와 구멍 간격 수치를 정리하고, 속지를 살 때 뭘 확인해야 바인더에 맞는 물건이 오는지까지 다룬다.
다이어리 속지 이름은 두 계보다: ISO 판형과 브랜드 관례
A5와 A6는 국제 종이 규격 ISO 216의 이름이다. A4를 반 접으면 A5(148×210mm), 또 반 접으면 A6(105×148mm)가 되는 그 체계라서, 어느 브랜드가 만들어도 종이 치수는 같다. 반면 미니, 포켓, 바이블은 표준 문서가 아니라 관례의 이름이다. 시스템 다이어리를 대중화한 영국 파일로팩스 계열의 판형 명칭이 업계 전체로 퍼진 경우로, 바이블(95×171mm)이라는 통칭도 성경책 판형과 비슷한 크기라는 데서 왔다. 파일로팩스 자신은 이 판형을 퍼스널이라 부르니, 같은 물건에 이름이 이미 두 개다.
문제는 이 두 계보가 쇼핑몰 옵션 목록에서는 아무 구분 없이 나란히 놓인다는 점이다. A6(105×148)와 포켓(81×120)은 이름의 출신이 다를 뿐인데 얼핏 같은 급처럼 보이고, 실제로는 종이 폭이 24mm나 다르다. 계보를 모르면 크기 감각이 계속 헛돈다.
판형별 치수와 구멍 정리: 미니, 포켓, 바이블, A5
파일로팩스 계열 규격을 기준으로 한 판형별 수치는 이렇다. 여러 브랜드가 이 배열을 따르는 사실상의 공용 규격이다.
| 판형 | 용지 치수 | 구멍 | 간격 |
|---|---|---|---|
| 미니 | 67×105mm | 5공 균등 | 19.05mm |
| 포켓 | 81×120mm | 6공 균등 | 19.05mm |
| 바이블(퍼스널) | 95×171mm | 6공, 3+3 | 그룹 안 19.05mm, 그룹 사이 50.8mm |
| A5 | 148×210mm | 6공, 3+3 | 그룹 안 19.05mm, 그룹 사이 69.85mm |
표에서 두 가지가 보인다. 먼저 미니는 6공이 아니라 5공이다. 6공 속지를 잘라서 끼우겠다는 계획은 여기서 무산된다. 그리고 바이블과 A5는 둘 다 3+3 배열의 6공이지만 그룹 사이 거리가 19mm쯤 달라서, 여섯 구멍 중 몇 개는 어떻게 우겨도 링에 걸리지 않는다. 6공이라는 표기만 믿으면 안 되는 구조적 이유는 6공 다이어리의 함정에서 자세히 다뤘다.
구멍 간격 19.05mm의 정체: 종이는 미터법, 구멍은 인치
19.05라는 어중간한 숫자가 계속 나오는 이유는 이것이 미터법 수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19.05mm는 4분의 3인치다. 바이블의 그룹 사이 50.8mm는 2인치, A5의 69.85mm는 2와 4분의 3인치. 영국에서 설계된 규격이라 구멍은 전부 인치 자로 뚫린다. 그러니까 A5 속지는 종이 치수는 미터법 표준을 따르는데 구멍 위치는 인치 관례를 따르는, 한 장 안에 두 도량형이 동거하는 물건이다. 이 사실을 알아낸 게 하필 새벽 두 시였고, 인치 환산표를 띄워놓고 혼자 꽤 통쾌해했다는 것을 굳이 기록해 둔다.
인치 계보는 브랜드 사이의 골도 설명한다. 미국계 플래너(프랭클린 계열)는 7공에 그룹 간격 1.5인치, 그룹 안 1인치라는 또 다른 인치 조합을 쓴다. 같은 인치 문화권인데 회사마다 다른 눈금을 골랐고, 그 결과 종이 크기가 비슷해도 구멍은 서로를 영원히 비껴간다. 표준의 부재가 아니라 표준의 과잉이 만든 비호환이다.

흔한 오해 정정: A6 바인더에 포켓 속지는 안 맞는다
속지 쇼핑에서 자주 반복되는 착각 세 가지를 정리한다. 첫째, A6와 포켓은 다른 판형이다. 둘 다 손바닥 크기라는 인상 때문에 섞어 부르기 쉽지만 종이부터 24mm 차이가 난다. 둘째, 미니는 5공이라 6공 어디와도 호환되지 않는다. 셋째, 판형명이 같아도 서드파티 속지 중에는 종이 폭이 규격보다 넓은 것이 있어서, 슬림한 커버에서는 속지가 바인더 밖으로 삐져나온다. 판형명 옆의 실측 치수까지 확인하는 습관이 이 마지막 함정을 막는다.
구멍 없는 리필 세계도 있다는 것을 덧붙여 둔다. 트래블러스노트 방식은 구멍 대신 고무줄로 공책을 통째 끼우는 구조라 이 규격 전쟁에서 비켜나 있다. 구멍 규격에 지친 사람이 그쪽으로 이주하는 이유를 이제는 이해한다.
속지 살 때 확인할 것: 판형명, 치수, 구멍 배열
정리하면 확인 목록은 세 줄이다. 판형명(미니·포켓·바이블·A5)을 찾고, 상세페이지의 용지 치수가 위 표와 맞는지 보고, 구멍 수와 배열(균등인지 3+3인지)을 본다. 셋 중 하나라도 표기가 없으면 반품 배송비를 낼 확률이 그만큼 올라간다.
이 목록이 필요 없는 사람도 물론 있다. 속지를 갈아 끼울 일 없는 제본 노트 사용자, 그리고 브랜드 정품 리필만 사는 사람이다. 정품 조합은 비싸지만 규격 공부를 통째로 건너뛰게 해 주니, 그 차액은 수업료를 아낀 값이라고 볼 수도 있다.
새벽의 인치 환산표는 스프레드시트 한 장으로 남았다. 판형 여섯 개에 열 세 개짜리 표인데, 다이어리 속지를 사는 데 필요한 건 그중 세 열뿐이었다. 나머지 열 개는 왜 만들었는지 지금도 설명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