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세 개가 연달아 있던 날, 퇴근 무렵의 할 일 목록을 보니 아침과 똑같았다. 지운 항목이 하나도 없는데 하루는 끝나 있었다. 목록은 죄가 없다. 할 일 목록이라는 양식에는 애초에 시간이라는 축이 없어서, 여덟 시간짜리 하루에 스무 시간어치 일을 적어도 아무 경고가 뜨지 않을 뿐이다.

그 결함을 보완하는 양식이 타임블로킹 플래너다. 하루를 시간 눈금으로 세로로 긋고, 할 일을 그 위에 블록으로 얹는다. 그런데 상품을 고르다 보면 같은 타임블로킹인데 어떤 것은 6시에 시작하고 어떤 것은 24시간이 다 있고, 눈금도 1시간짜리와 30분짜리가 섞여 있다. 이 글은 그 차이가 지면 위에서 무엇을 바꾸는지 계산해 보고, 일과 유형별로 맞는 레이아웃을 고르는 기준을 정리한다.

타임블로킹이란: 할 일을 시간 위에 얹는 방식

타임블로킹은 할 일 목록을 버리고 하루의 시간 자체를 블록으로 쪼개 각 블록에 일을 배정하는 방법이다. 딥 워크의 저자 칼 뉴포트가 대중화했고, 그는 시간을 블록으로 관리한 주 40시간이 구조 없이 굴린 60시간 이상과 같은 산출을 낸다고까지 말한다. 과장이 섞였는지는 각자 검증할 일이지만, 원리는 명확하다. 일을 시간 위에 얹는 순간 하루의 총량이 눈에 보이고, 안 들어가는 일은 계획 단계에서 탈락한다. 목록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종이 플래너로 하는 타임블로킹의 지면은 대체로 세 부품으로 이루어진다. 세로 시간축 그리드, 그리드 옆의 메모 열, 그리고 계획이 깨졌을 때 다시 그리는 수정 공간이다. 뉴포트의 전용 플래너는 아예 하루 지면에 계획 열을 여러 개 두는데, 계획은 깨지는 것이 정상이고 다시 그리는 것까지가 방법이라는 설계 사상이다.

타임블로킹 플래너 하루 지면의 시간축 그리드와 수집 칸, 수정 열 구조 모식도
타임블로킹 플래너 지면 구조 모식도

칸 높이 계산: 30분 칸에는 글씨가 안 들어간다

플래너 상세페이지가 잘 말해주지 않는 수치가 칸 높이다. 지면에서 직접 계산할 수 있다. A5 판형의 세로는 210mm, 날짜 표기와 여백을 빼면 시간 그리드에 쓸 수 있는 높이는 얼추 170mm 안팎이다(여백 설계에 따라 다르다). 이 170mm를 몇 칸으로 나누느냐가 해상도다.

24시간을 다 담으면 한 시간 칸이 약 7mm다. 6시부터 22시까지 16시간이면 약 10.6mm로 늘어난다. 그런데 해상도를 30분으로 올리면 16시간 기준으로도 칸당 5.3mm. 일반 유선 노트의 줄간격이 6~8mm라는 것을 생각하면(노트 줄간격과 글씨 크기에서 따져본 값이다), 5.3mm 칸은 보통 손글씨가 물리적으로 들어가지 않는 높이다. 그래서 잘 만든 플래너는 30분을 독립 칸으로 만들지 않고 1시간 실선 사이에 점선으로만 긋는다. 글씨는 1시간 높이에 쓰되 블록의 경계만 30분 단위로 세울 수 있게 한 타협이고, 나는 이 점선의 용도를 알고 나서야 이 양식들이 꽤 머리를 쓴 물건이라는 걸 인정하게 됐다.

같은 A5 지면에서 시간축 범위와 해상도에 따라 달라지는 칸 높이 계산 모식도
시간축 설계별 칸 높이 계산 모식도

시간축 범위: 수면을 지면에서 지워 해상도를 산다

같은 계산이 시간축 범위도 설명한다. 지면 높이는 유한하니 시간을 덜 담을수록 칸이 커진다. 24시간축을 16시간으로 자르면 칸 높이가 대략 1.5배가 된다. 플래너들이 새벽 1시부터 5시를 과감히 삭제하는 이유는 게을러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용자가 그 시간에 잠들어 있고 그 여백을 낮의 해상도로 바꾸는 쪽이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수면을 팔아 해상도를 사는 거래다.

문제는 그 거래의 기준선이 제조사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시작 시각이 5시인 플래너와 7시인 플래너가 섞여 있고, 새벽 5시에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7시 시작 플래너를 사면 매일 첫 두 시간을 여백에 손으로 그려 넣게 된다. 살 때 첫 줄의 숫자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피할 수 있는 불행이다. 밤 근무나 새벽 작업이 일상인 사람이라면 아예 24시간축이 맞고, 칸 높이 손해는 그 대가로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손목시계를 찬 손으로 책상 위 노트에 메모를 적는 모습
시간축 양식은 하루를 지면 위에 미리 배치하게 만든다

어떤 타임블로킹 플래너를 살까: 일과 유형별 기준

기준은 하루가 쪼개지는 단위다. 회의와 통화로 하루가 30분 단위로 조각나는 일과라면 30분 점선이 있는 16시간축이 맞다. 블록 경계를 세밀하게 세울 일이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두세 시간짜리 몰입 작업이 중심이라면 1시간 눈금이면 충분하고, 칸이 큰 쪽이 블록 안에 세부 메모를 적기에 오히려 낫다. 계획이 자주 깨지는 환경(끼어드는 요청이 많은 일)이라면 수정 열이 있는 양식이 죄책감을 줄여 준다. 다시 그리는 것이 실패가 아니라 절차가 되기 때문이다.

필요 없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하루 일정이 이미 회사 캘린더로 통제되는 사람에게 종이 타임블로킹은 같은 그림을 두 번 그리는 일이다. 또 할 일이 두세 개뿐인 날이 많은 사람에게는 시간축이 과잉 설계다. 그런 기록량이면 위클리 플래너 쪽이 맞고, 시간 대신 순서만 관리하고 싶다면 불렛저널의 데일리 로그가 더 가볍다.

이 글의 초안 작성에는 블록 두 개를 배정했었다. 실제로는 네 개를 썼다. 소요 시간 과소 추정은 타임블로킹의 고전적인 함정이라고 자료마다 적혀 있었는데, 알고도 당하는 것이 고전의 힘인 모양이다. 다음 블록은 비워 뒀다. 이제 이 문장으로 그 블록도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