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록 귀퉁이에 작은 표를 그릴 일이 있었다. 열 셋에 행 넷짜리. 가로줄은 노트에 이미 그어져 있으니 세로줄 세 개만 그으면 되는데, 자 없이 그은 세 줄이 하나같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표 하나가 사람을 이렇게 겸손하게 만든다. 그날 밤 모눈 노트를 검색하다가 더 앞선 갈림길에서 멈췄다. 같은 노트가 유선, 모눈, 도트, 무지 네 가지 속지로 나온다. 이 넷은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고르는 물건인가.
먼저 답을 말하면, 속지 네 종류의 차이는 종이가 주는 안내선의 양이고, 고르는 기준은 취향이 아니라 주로 남기는 기록의 종류다. 문장이면 유선, 표면 모눈, 양식을 직접 그리면 도트, 그림이면 무지. 이 글은 유선·모눈·도트·무지 네 속지의 구조 차이와 브랜드마다 약속한 듯 똑같은 격자 간격 5mm, 그리고 도트 노트가 불렛저널의 표준이 된 이유까지 제조사 공개 스펙을 모아 정리한다.

노트 속지 4종류, 차이는 안내선의 양이다
넷을 한 줄에 세우면 이렇다. 유선은 가로줄만 있다. 글씨의 세로 위치, 그러니까 줄맞춤 하나를 잡아준다. 모눈은 거기에 세로줄을 더한다. 위치에 더해 칸의 폭과 비율까지 잡아주고, 선이 이어져 있어서 표를 그릴 때 종이의 선을 그대로 빌려 쓸 수 있다. 도트는 모눈에서 선을 지우고 교차점만 남긴 것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찍힌 점이 좌표를 알려주되, 선을 긋는 일은 손에게 남긴다. 무지는 아무것도 없다. 종이가 아무 안내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넷은 서로 다른 취향이 아니라 안내의 양이 다른 한 계열이다. 안내가 많을수록 글씨와 도형은 가지런해지고, 대신 내가 그리지 않은 잉크가 지면에 늘 깔려 있게 된다. 유선의 줄간격이 6~8mm로 세분화되어 있듯(노트 줄간격 비교) 안내선에는 저마다 치수가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모눈과 도트로 넘어가면 이 치수가 브랜드를 가리지 않고 하나로 수렴한다는 점이다.
모눈 노트 간격은 왜 전부 5mm인가
주요 브랜드의 공개 스펙을 모으면 숫자가 먼저 답한다. 격자는 5mm다. 독일 로이텀1917의 도트 노트는 5mm 간격에 80gsm 종이를 쓰고, 프랑스 로디아는 방안 패드와 도트 패드가 같은 5mm 치수를 공유한다. 일본 코쿠요의 캠퍼스 방안 노트도 5mm, 미도리 MD 노트의 방안도 5mm다. 나라가 셋으로 갈리는데 숫자는 하나다. 넷째 브랜드쯤에서 결국 스펙 시트를 열었고, 시트를 열었다는 것은 이 조사가 끝을 보게 됐다는 뜻이다.
왜 하필 5mm인가. 유선 줄간격이 6~8mm인 것과 비교하면 모눈 한 칸은 글씨 한 줄로 쓰기에 분명 좁다. 힌트는 모눈 한 칸이 글씨 줄이 아니라 단위라는 데 있다. 글씨는 두 칸에 한 줄을 쓰면 10mm로 넉넉하고, 촘촘하게 쓰는 손은 한 칸 반(7.5mm)을 쓴다. 표의 행 높이는 한 칸이나 두 칸, 들여쓰기와 체크박스는 한 칸. 배로 늘리든 반으로 쪼개든 전부 쓸 만한 치수가 나오는 값이 5mm 근처라는 이야기다. 6mm 격자였다면 두 칸이 12mm로 벌어져 글씨 줄로는 어색해진다. 규격 문서가 강제한 표준이라기보다, 쓸모가 수렴시킨 표준으로 보는 쪽이 자연스럽다.
도트 노트가 불렛저널 표준이 된 이유
도트 노트의 유행은 불렛저널과 함께 왔다. 위키백과의 불렛저널 항목은 이 이름이 할 일을 적는 불릿 기호에서 왔고, 부분적으로는 점으로 괘선을 대신한 도트 노트(dotted journal)에서도 왔다고 설명한다. 창시자 라이더 캐롤이 로이텀1917과 협업해 내놓은 공식 노트북 역시 도트다. 기록법 하나가 속지 하나를 표준 자리에 밀어 올린, 문구 시장에서 드문 사건이다.
이유는 불렛저널의 구조에 있다. 불렛저널은 인쇄된 양식이 없는 다이어리라서 먼슬리 캘린더도 해빗 트래커도 손으로 직접 그린다. 그리는 동안에는 세로 안내가 필요하니 무지는 탈락이고, 모눈을 쓰면 양식을 완성한 뒤에도 격자선이 지면에 가득 남는다. 도트는 그릴 때는 좌표가 되고 다 그리면 배경으로 물러난다. 로디아는 자사 도트 제품을 두고 복사하거나 스캔하면 도트가 보이지 않는다고 안내하는데, 격자의 기능만 남기고 존재감을 지운 이 절충이 도트라는 속지의 정체다.
무지 노트가 어려운 이유, 그래도 맞는 사람
무지의 자유에는 값이 붙고, 그 값은 손이 치른다. 안내선이 없으면 글줄은 대개 처지거나 슬금슬금 올라가고, 글씨 크기도 페이지 앞과 뒤에서 달라진다. 문장 기록이 주력인 사람에게 무지는 넷 중 가장 어려운 속지다.
반대로 배경 잉크가 하나도 없다는 조건은 다른 종류의 기록에서 최고가 된다. 다이어그램, 스케치, 마인드맵처럼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기록, 그리고 잉크의 발색과 종이의 질감 자체를 보는 용도. 종이를 내세우는 라인에 무지가 빠지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미도리 MD 노트가 무지·유선·방안에 도트까지 나란히 두는 것은 종이가 상품일 때 무지가 그 종이를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잉크가 뒷면까지 비치고 번지는 문제는 속지가 아니라 평량과 표면 처리의 영역이니 따로 보면 된다.
글·표·그림, 기록의 종류로 고른다
기준을 한 줄로 줄이면 이렇다. 문장만 쓰면 유선, 표와 숫자가 잦으면 모눈, 양식을 직접 그리면 도트, 그림과 발산이 주력이면 무지. 지난 노트 열 페이지를 넘겨 보면 답은 이미 나와 있다. 표를 그린 적도 양식을 짠 적도 없다면 이 고민 전체가 필요 없는 사람이다. 쓰던 유선 노트가 정답이고, 차라리 줄간격을 따지는 쪽이 실속 있다. 반대로 페이지마다 손으로 그은 세로줄이 남아 있다면, 그 일을 종이에게 넘길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을 것이다.
나는 세로줄 세 개가 삐뚤어진 데서 출발해 사흘 만에 세 나라 문구 브랜드의 격자 스펙 시트를 갖게 됐다. 모눈 노트는 아직 사지 않았다. 쓰던 노트를 다 쓰면 사기로 했는데, 이 결심의 유통기한이 문구 매대 앞에서 며칠이나 갈지는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