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트한 원고에 연필로 교정 표시를 하고 지우다가 책상 위에 가루가 눈처럼 쌓였다. 옆자리 동료의 지우개는 가루가 알아서 뭉쳐서 손날로 한 번에 쓸려 나가는데, 내 것은 잘게 흩어져 소매에까지 붙는다. 같은 연필, 같은 종이인데 지우개만 다르다.

그래서 검색창을 열었다. (지우개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가루 적은 지우개는 실제로 따로 있고, 그 차이는 지우개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에서 갈린다. 이 글은 지우개가 가루를 만드는 원리, 고무 지우개와 비닐(PVC) 지우개의 성분 차이, 가루가 뭉치는 이유, 그리고 가루가 아예 안 나오는 지우개까지 정리한다.

분홍색 캡 지우개가 달린 연필 클로즈업
고무 캡 지우개, 이 글에서 다루는 두 갈래 중 하나

지우개 가루는 왜 생기는가

지우개 가루는 지우개가 일하면서 자기 몸을 깎아 낸 부스러기다. 연필은 종이 표면에 얇은 흑연 막을 얹어 놓는데, 지우개는 이 막을 문질러서 물리적으로 떼어낸다. 캐나다 맥길 대학교 과학 상식 사이트(Office for Science and Society)는 지우개의 작동 원리를 "마찰의 물리적 작용"이라고 설명한다. 종이를 미는 게 아니라 표면을 갈아내는 도구라는 뜻이다.

문제는 이 갈아내는 과정에서 지우개 표면도 함께 닳는다는 것이다. 흑연을 떼어낸 지우개 조각이 바로 가루고, 그 조각이 어떤 모양으로 떨어져 나오는지는 지우개 재료의 결합 방식에 달렸다. 여기서부터 고무 지우개와 비닐 지우개가 갈린다.

고무 지우개와 비닐 지우개, 성분부터 다르다

지우개는 크게 두 갈래다. 황으로 굳힌 고무, 그리고 가소제(딱딱한 수지를 말랑하게 만드는 첨가제)로 부드럽게 만든 PVC(폴리염화비닐)다. 재료가 다르니 가루의 결도 다르다.

고무 지우개는 천연 또는 합성 고무에 황을 넣어 가황(경화) 처리하고, 여기에 부석(화산에서 나온 다공질 암석 가루) 을 섞어 마모력을 준다. 맥길 대학교 설명에 따르면 이 부석은 규산화물 약 75%와 산화알루미늄 약 25%로 이루어진 미세 분말이며, 사포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여기에 식물성 오일을 더해 고무를 손으로 쥐기 편하게 부드럽게 만든다.

비닐 지우개는 뼈대부터 다르다. PVC 수지에 가소제(프탈레이트 계열이 대표적)를 넣어 유연하게 만들고, 탄산칼슘을 채워 넣어 마모력과 형태를 잡는다. 미국 문화유산 보존 학회지에 실린 1997년 연구는 시판 비닐 지우개 두 종을 분석했는데, 한 제품은 가소제 비중이 약 34%, 다른 제품은 약 55%였다. 절반 넘게 가소제로 채운 지우개도 있다는 뜻이다. (지우개의 반 이상이 말랑한 첨가제라는 걸 알고 나니 살짝 배신감이 들었다.)

고무 지우개와 비닐 지우개의 성분·가루 형태 비교 모식도
고무는 부서지고 비닐은 뭉친다, 성분 비교 모식도

지우개 가루가 뭉치는 이유

가루의 모양을 가르는 건 결합제, 그러니까 재료를 얼마나 붙잡아 두는 성분이 들어 있는가다. 고무의 황가교는 사슬과 사슬을 군데군데 점으로 이어 붙이는 방식이라 비교적 뻣뻣하다. 부석에 갈릴 때 이 가교점 사이에서 뚝뚝 끊어지기 쉬워 잘게, 독립적으로 부서지는 쪽으로 추정한다.

비닐 지우개는 이야기가 다르다. 가소제가 사슬 전체를 미끄럽게 풀어 놓아서, 마모돼 떨어져 나온 조각끼리도 서로 들러붙는 힘을 유지한다. 그 결과가 손으로 뭉쳐서 한 번에 쓸어 낼 수 있는 긴 가닥이다. 위키백과의 지우개 항목도 같은 맥락의 설명을 담고 있다. 비닐 지우개는 떼어낸 흑연이 표면에 남지 않고 떨어져 나가는 비닐 조각 안으로 흡수되기 때문에 더 깨끗하게 지워진다는 것이다. 흑연이 가루 속에 갇혀 함께 떨어져 나가니, 책상에는 그만큼 덜 남는다.

가루가 아예 안 나오는 지우개도 있다

반죽형 지우개(putty rubber, 흔히 미술용 떡지우개)는 애초에 부석 같은 마모재가 들어 있지 않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 지우개는 반죽 같은 점성을 가지고 있어서, 지우는 동안 주변의 흑연 입자를 표면으로 서서히 흡수한다. 갈아내는 게 아니라 빨아들이는 방식이라 가루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표면이 더러워지면 손으로 주물러 깨끗한 안쪽을 겉으로 꺼내면 그만이다.

대신 이 지우개는 흑연을 완전히 하얗게 지워내지는 못한다. 문질러도 옅은 자국이 남는 경우가 많다. 데생의 음영을 살살 덜어내는 용도로는 좋지만, 서류의 연필 표시를 깔끔히 없애야 하는 자리에는 잘 안 맞는다.

그래서 어떤 지우개를 고르나

책상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싶다면 비닐(PVC) 지우개 쪽이 유리하다. 가루가 뭉쳐서 한 번에 치우기 쉽고, 흑연을 가루 속에 가둬서 떼어내는 성질도 있다. 지우는 힘 자체나 내구성을 우선한다면 고무 지우개도 성능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가루가 흩어질 뿐이지 지우는 능력은 별개다. 음영을 살살 조절하거나 세밀한 부분만 지워야 한다면 반죽형이 맞다. 다만 완전히 하얗게 지워야 하는 작업에는 안 맞는다.

펜이나 만년필만 쓰고 연필을 거의 안 쓰는 사람이라면, 이 차이는 애초에 상관없는 이야기다. 지우개가 흑연을 지우는 원리를 먼저 읽고 오면 이 글의 성분 얘기가 더 잘 붙는다. 지우개와 짝을 이루는 연필 경도 기호도 함께 보면 좋다. 무른 심(B 계열)일수록 흑연이 많이 묻어서 가루도 그만큼 늘어난다.

이 글을 쓰느라 원래 지우려던 원고 교정 표시는 그대로 남아 있다. 대신 나는 지우개 성분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됐다. 다음엔 반죽형 지우개가 왜 오래 두면 딱딱해지는지 알아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