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서랍 안쪽에서 두 달 만에 형광펜을 꺼냈다. 뚜껑은 분명히 닫아뒀는데 첫 줄부터 색이 반쯤 죽어 있었다. 뚜껑을 닫는 것과 마르지 않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는 뜻이다.

형광펜이 마르는 속도는 뚜껑의 밀폐 구조에 따라 크게 갈린다. 같은 시간을 방치해도 어떤 형광펜은 멀쩡하고 어떤 형광펜은 반나절 만에 갈라진 소리를 낸다. 형광펜이 애초에 왜 빛나 보이는지는 다른 질문이다(관련 글: 형광펜은 왜 형광인가). 오늘 파고들 건 마름의 문제, 정확히는 뚜껑 구조와 잉크 증발의 관계다.

형광펜 잉크는 왜 마르는가

형광펜이 마르는 이유는 잉크 안의 휘발 성분이 공기 중으로 날아가기 때문이다. 형광펜 잉크는 대부분 물을 기본 용매로 색소를 녹인 수성 잉크인데, 펠트촉을 타고 잘 흐르도록 점도를 낮추는 용도로 에탄올이나 이소프로판올 같은 알코올을 소량 섞는 제품이 많다.

문제는 이 알코올의 휘발성, 그러니까 공기 중으로 빠르게 날아가는 성질이 강하다는 점이다. 뚜껑이 열려 있으면 알코올부터 먼저 증발하고, 남은 물과 색소만으로는 점도가 급격히 올라간다. 펠트 섬유 사이에서 그대로 굳어버리면 다시 눌러도 잉크가 올라오지 않는다. 이 휘발 원리는 볼펜 잉크가 마르는 이유와도 결이 비슷하다. 필기구 종류는 달라도 액체가 마르는 물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뚜껑 하나에 이렇게까지 파고들 일인가 싶다가도, 마르는 이유를 알아야 마음이 놓이는 성미라 어쩔 수 없다.)

뚜껑 구조에 따라 밀폐력이 갈리는 이유

뚜껑이 잉크를 지키는 힘은 여닫는 방식보다 접촉면이 얼마나 촘촘히 맞물리느냐에서 갈린다. 나사식(트위스트) 뚜껑은 나선을 따라 돌려 잠그는 동안 둘레 전체가 서서히, 고르게 압착된다. 이 압착이 만드는 틈은 좁고 길어서 공기가 안까지 들어오는 경로 자체가 늘어난다.

반면 스냅식, 그러니까 딸깍 눌러 끼우는 뚜껑은 몇 군데 돌기가 걸쇠 역할을 하고 나머지 둘레는 헐거운 틈으로 남을 여지가 있다. 이 틈이 공기가 드나드는 지름길이 되면 증발도 그만큼 빨라진다. 자석으로 금속 볼을 당겨 막는 마그네틱 방식도 미국 특허에 등장하지만, 국내에서 흔히 보는 형광펜에는 아직 드물다.

나사식과 스냅식 형광펜 뚜껑의 밀폐 구조 비교 모식도
뚜껑 구조별 공기 침투 경로 모식도

형광펜 뚜껑을 얼마나 열어둬도 괜찮은가

제조사가 공개한 수치로 보면 방치해도 되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독일 스타빌로는 자사 BOSS ORIGINAL 형광펜에 뚜껑을 열어둬도 4시간까지는 마르지 않는다는 anti-dry-out 기술을 제품 스펙으로 명시한다.

반나절 회의 내내 뚜껑을 열어둔 채 쓰는 습관이 있다면 이미 그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특정 제품이 공개한 스펙이라 모든 형광펜에 똑같이 적용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형광펜 잉크의 방치 한계가 며칠이 아니라 몇 시간 단위라는 감을 잡기엔 충분한 숫자다. 뚜껑 없이 하루를 넘기면 대부분 위험 구간에 들어간다고 보는 편이 안전하다.

뚜껑이 열린 노란색·주황색 형광펜과 볼펜, 안경이 책상 위에 흩어져 있다
뚜껑을 열어둔 순간부터 증발은 이미 시작된다

형광펜 안 마르게 오래 쓰는 법

결국 답은 두 가지다. 뚜껑을 끝까지 확실히 밀폐하고, 쓰는 도중 열어두는 시간 자체를 줄이는 것. 회의록에 밑줄을 그으며 형광펜 서너 자루를 번갈아 쓰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뚜껑이 열려 있는 시간도 길어지니, 나사식 제품이 유리하다.

책 한 권 읽으면서 형광펜 한 자루만 가끔 꺼내 쓰는 사람에게는 이 차이가 거의 안 느껴진다. 여닫는 횟수 자체가 적어서 뚜껑 구조가 밀폐력을 시험받을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니 뚜껑 구조까지 따져가며 고를 필요는 없다. 딸깍 소리가 나게 확실히 닫히는지, 그것만 확인해도 충분하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다음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이미 굳은 형광펜은 정말 버려야 하는가, 아니면 살릴 방법이 있는가. 또 새벽에 검색창을 열게 생겼다. 그건 다음 궁금증으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