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서랍 안쪽에서 두 달 만에 형광펜을 꺼냈다. 뚜껑은 분명히 닫아뒀는데 첫 줄부터 색이 반쯤 죽어 있었다. 뚜껑을 닫는 것과 마르지 않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는 뜻이다.
형광펜이 마르는 속도는 뚜껑의 밀폐 구조에 따라 크게 갈린다. 같은 시간을 방치해도 어떤 형광펜은 멀쩡하고 어떤 형광펜은 반나절 만에 갈라진 소리를 낸다. 형광펜이 애초에 왜 빛나 보이는지는 다른 질문이다(관련 글: 형광펜은 왜 형광인가). 오늘 파고들 건 마름의 문제, 정확히는 뚜껑 구조와 잉크 증발의 관계다.
형광펜 잉크는 왜 마르는가
형광펜이 마르는 이유는 잉크 안의 휘발 성분이 공기 중으로 날아가기 때문이다. 형광펜 잉크는 대부분 물을 기본 용매로 색소를 녹인 수성 잉크인데, 펠트촉을 타고 잘 흐르도록 점도를 낮추는 용도로 에탄올이나 이소프로판올 같은 알코올을 소량 섞는 제품이 많다.
문제는 이 알코올의 휘발성, 그러니까 공기 중으로 빠르게 날아가는 성질이 강하다는 점이다. 뚜껑이 열려 있으면 알코
내 얇은 사전에 형광 줄을 그었더니 뒷장의 단어 세 개가 노란 배경을 얻어버렸다. 앞장을 강조했는데 뒷장이 멋대로 편집된 것이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 이야기는 아니다. 빌린 책에 형광펜을 긋는 건 그 자체로 범죄니까.)
얇은 종이에서 형광펜이 사고를 내는 원인은 두 가지다. 잉크가 종이를 뚫고 스며드는 번짐, 그리고 색이 뒷면까지 보이는 비침. 이 글은 그 원인을 정리하고, 뒷면을 지키는 대안 세 가지(고체 형광펜, 파스텔 형광펜, 드라이 하이라이터)를 스펙 기준으로 비교한다.
형광펜이 뒷면까지 비치는 이유
형광펜이 뒷면을 망치는 경로는 두 갈래다. 첫째, 형광펜은 잉크를 많이 쏟는 도구다. 넓은 칩으로 면을 칠하는 구조라 필기구 중에서도 단위 면적당 잉크 방출량이 가장 많은 축인데, 수성 잉크가 이 정도 양으로 들어오면 사전지 같은 얇은 종이는 그냥 뚫려버린다. 이게 번짐이다. 둘째, 용케 안 뚫려도 문제가 남는다. 형광색은 빛을 더해 내보내는 색이라 존재감이 워낙 강해서
책장을 정리하다가 7년 전 수험서를 펼쳤다. 볼펜 밑줄은 멀쩡한데 형광펜 자국만 유령처럼 옅어져 있었다. 같은 페이지에서 하나는 살아남고 하나는 증발했다면, 두 잉크는 애초에 다른 원리로 살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글은 형광펜의 원리를 정리한다. 형광펜이 왜 유난히 밝게 보이는지, 왜 노란색이 표준이 됐는지, 왜 햇빛에 바래는지. 셋 다 형광 염료라는 하나의 원리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책 정리는 그 자리에서 중단됐다. 궁금한 게 생기면 하던 일이 멈추는 체질이라 어쩔 수 없다.
형광펜이 유난히 밝아 보이는 이유
형광펜이 밝아 보이는 이유는 받은 빛보다 많은 빛을 눈에 돌려보내기 때문이다. 색이 진해서 튀는 게 아니라, 물리적으로 더 많은 빛이 눈에 들어온다.
일반 잉크의 색은 뺄셈으로 만들어진다. 종이에 닿은 빛 가운데 일부 파장을 흡수하고 나머지를 돌려보내는 방식이라, 빨간 잉크는 빨강 이외의 빛을 삼켜서 빨갛게 보인다. 당연히 들어온 빛보다 많은 빛이 나갈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