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가 두 시간을 넘어가면 항상 같은 손이 먼저 지친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 펜을 쥔 자리다. 그날 들고 간 만년필 두 자루를 번갈아 쓰다가 이상한 걸 느꼈다. 하나는 쥐고 있어도 손이 편한데, 다른 하나는 쥐자마자 서늘하고 삼십 분쯤 지나면 손끝이 뻐근해졌다. 무게 차이인가 싶어 재보니 큰 차이가 없었다. 다른 건 그립부(펜을 쥐는 부분) 소재였다. 하나는 경질고무, 하나는 금속이었다. 당신 필통에도 유난히 서늘하게 느껴지는 펜 한 자루쯤 있을 것이다.
만년필 그립부는 크게 경질고무(에보나이트), 레진(플라스틱), 금속 세 가지로 나뉜다. 이 소재 차이가 손의 피로도를 가르는 진짜 이유는 무게보다 '마찰이 붙는 속도'와 '열을 빼앗는 속도'에 있다.
만년필 그립부 소재 종류, 경질고무·레진·금속
그립부에 쓰이는 소재는 경질고무, 레진, 금속 세 갈래로 나뉜다. 경질고무는 상표명으로는 에보나이트라 부르는데, 고무를 황으로 가황 경화시킨 소재다. 가공이 까다롭고 손이 많이 가서 요즘은 일부 고가 라인이나 한정판에만 쓴다. 에보나이트는 만년필 피드에도 쓰이는 소재인데, 친수성이 있어 잉크를 잘 머금기 때문이다. 레진은 지금 나오는 만년필 대부분이 채택한 소재로, 가볍고 성형이 쉬워 색상과 질감을 자유롭게 낼 수 있다. 금속은 몸통 전체나 그립부만 금속으로 만든 경우인데, 무게감과 내구성을 강조하는 라인에서 주로 쓴다.
손 피로는 왜 소재에 따라 달라지나
손이 편한 그립은 손끝이 힘을 덜 들이고도 미끄러지지 않는 그립이다. 사람이 물건을 쥘 때 손끝과 표면 사이의 마찰은 두 갈래로 생긴다. 하나는 표면 자체의 요철이 만드는 마찰이고, 다른 하나는 손끝 피부의 수분이 표면에 스며들며 만드는 마찰이다. 경질고무나 질감 있는 금속처럼 표면 자체에 미세한 저항이 있는 소재는 쥐는 즉시 안정적인 접점이 생긴다. 반면 매끈하게 연마된 금속이나 광택 레진은 피부 수분이 표면에 스며들어야 마찰이 붙는데, 이 과정에 최대 20초가 걸린다는 분석도 있다. 그 20초 동안 손끝은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더 힘을 준다. 장시간 필기에서는 이 여분의 힘이 쌓여 피로가 된다.
그립부 무게 차이, 숫자로 보면 이만큼 난다
밀도로 계산하면 금속 그립은 같은 부피 기준 경질고무보다 일곱 배 넘게 무겁다. 경질고무(에보나이트)의 밀도는 1.151.2g/cm³, 레진 계열(ABS 기준)은 1.051.1g/cm³로 둘은 비슷하다. 황동은 8.48.7g/cm³다. 그립부 부피를 5cm³로 가정하면(그립 하나 정도의 부피를 대략 잡은 값이다) 경질고무·레진 그립은 56g, 황동 그립은 42~44g이 나온다. 무게 자체보다 이 무게가 손끝 접점 한 곳에 계속 걸린다는 게 문제다. 쥐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하중을 버티는 손의 부담도 함께 늘어난다.

금속 그립이 유독 차갑게 느껴지는 이유
차갑다고 느끼는 건 착각이 아니라 열전도율 차이다. 황동의 열전도율은 100150W/(m·K) 사이로, 레진(ABS 기준 0.10.3W/(m·K))보다 수백 배 높다. 열전도율이 높다는 건 손의 체온을 그만큼 빨리 가져간다는 뜻이다. 쥐는 순간 표면 온도가 체온과 비슷해지는 레진·경질고무와 달리, 금속은 계속 주변 온도로 열을 흘려보내며 손에서 열을 계속 빼앗는다. 그래서 쥐고 몇 초 지나면 미지근해지는 레진과 달리 금속은 쥐고 있는 내내 서늘하다. (사무실에서 금속 볼펜과 플라스틱 볼펜을 번갈아 쥐어보면 같은 차이를 손끝으로 바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그립을 고르나
결론부터 말하면 긴 글을 자주 쓰는 손에는 경질고무나 무광 텍스처 레진이 유리하고, 짧게 자주 쓰는 손이나 무게감 자체를 즐기는 손에는 금속도 괜찮은 선택이다. 회의록처럼 30분 넘게 이어 쓰는 용도라면 접점이 빨리 잡히고 열을 뺏기지 않는 소재가 낫다. 반대로 서명이나 메모처럼 짧게 여러 번 쓰는 용도, 혹은 손이 원래 잘 따뜻한 편이라면 금속 그립의 서늘함과 묵직함이 오히려 좋은 필기감으로 느껴질 수 있다. 손이 작거나 쉽게 시린 손에는 금속 그립을 권하기 어렵다. 굵기까지 함께 고려한다면 닙 굵기별로 필기 두께가 달라지는 이유도 참고할 만하다.
이 계산을 하다가 서랍 속 펜을 죄다 꺼내 손으로 쥐어보며 삼십 분을 보냈다. 온도 차이를 확인하겠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결국 손에 쥔 순서대로 좋아하는 펜 우선순위까지 다시 매겼다. 원래 계획엔 없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