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화점 색연필 한 통을 오래 쓰다 보면 이상한 패턴이 생긴다. 빨간색은 금방 닳는데 파란색은 멀쩡하고, 겹쳐 칠해도 어떤 색은 잘 섞이고 어떤 색은 위에 덮이기만 한다. 나중에 성분을 뒤졌더니 답은 심 안쪽에 있었다. 심에 들어간 안료 입자 크기와 바인더 비율이 달랐고, 유성 색연필과 수성 색연필의 심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곳에서 갈렸다.

색연필의 발색과 혼색 능력은 심에 든 바인더 종류가 거의 결정한다. 유성이냐 수성이냐는 단순히 물에 녹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아니라, 심의 딱딱함, 안료가 종이에 달라붙는 방식, 색이 섞이는 조건 전체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색연필 심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나

색연필 심은 안료(pigment), 바인더(binder), 필러(filler) 세 가지 재료의 조합이다. 안료가 색을 내고, 바인더가 안료 입자들을 한데 묶어 심 모양으로 굳혀주고, 필러는 초크나 점토 같은 충전재로 심의 강도와 발림성을 조절한다.

바인더가 무엇이냐에 따라 유성 색연필과 수성 색연필이 나뉜다. 유성 색연필은 왁스(파라핀 왁스 또는 카르나우바 왁스)나 오일을 바인더로 쓴다. 일반 사무용 색연필과 미술용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수성 색연필(수채 색연필)은 검 아라빅(gum arabic)처럼 물에 녹는 수용성 바인더를 쓴다.

유성 내에서도 왁스 기반과 오일 기반이 다시 나뉜다. 왁스 기반은 심이 부드럽고 발림성이 좋다. 오일 기반(미술용 폴리크로모스 같은 제품군)은 심이 조금 더 단단하고 발색이 선명하다. 겉보기엔 비슷하지만 종이 위에서 반응하는 방식이 다르다.

색연필 심 성분 구조 비교 모식도
유성(왁스·오일)과 수성(수용성 바인더) 색연필 심 성분 비교 모식도

유성 색연필이 잘 발리는 이유

유성 색연필의 심은 마찰열로 반응한다. 심이 종이 표면에 닿아 마찰될 때 왁스나 오일이 살짝 녹으면서 안료 입자가 종이 섬유 사이에 박힌다. 이 과정이 유성 색연필 특유의 부드러운 발림과 광택감을 만든다.

왁스 기반은 레이어링(색을 여러 겹 쌓기)에 유리하다. 아래 층의 왁스가 위에 칠할 때 다시 반응해서 안료들이 서로 섞인다. 혼색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구조다. 단점은 왁스 블룸(wax bloom)이다. 완성된 그림 표면에 시간이 지나면서 흰 먼지 막 같은 것이 생기는 현상인데, 왁스 성분이 표면으로 이동하면서 생긴다. 픽사티브(fixative) 스프레이로 방지할 수 있다.

오일 기반은 왁스 블룸이 없고 발색이 더 선명하다. 심이 단단한 만큼 세밀한 묘사에 유리하지만, 혼색을 위해 왁스 기반보다 더 많은 압력이 필요하다.

여러 색의 색연필들이 나란히 줄지어 놓인 모습
색연필

수성 색연필이 물을 만나면 달라지는 이유

수성 색연필 심의 수용성 바인더는 물을 만나면 녹는다. 건식으로 쓸 때는 일반 색연필처럼 종이에 안료 층을 남긴다. 그런데 붓으로 물을 얹으면 바인더가 녹으면서 안료가 물 안으로 분산된다. 그 물이 종이 위를 번지면서 수채화 물감을 바른 것과 비슷한 투명한 색 층이 만들어진다.

바인더가 수분에 약한 만큼, 수성 색연필 심은 유성보다 단단하게 만들어진다. 이 때문에 건식 상태의 발색은 유성보다 연하고, 층겹 혼색 능력도 제한적이다. 수성 색연필이 진가를 발휘하는 건 물을 썼을 때다. 건식으로만 쓴다면 수성을 선택할 이유가 절반쯤 사라진다.

혼색이 잘 되는 조건

혼색은 먼저 칠한 층의 안료와 바인더가 위에 칠할 때 물리적으로 다시 섞여야 일어난다. 왁스 기반이 혼색에 유리한 것은 바인더가 부드러워서 마찰에 쉽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오일 기반은 레이어링(층겹 쌓기)은 잘 되지만, 강한 압력으로 색을 완전히 뭉개는 번싱(burnishing)은 왁스 기반보다 어렵다. 솔벤트(아이소프로필 알코올이나 전용 블렌딩 펜슬)를 이용하면 두 방식 모두 혼색이 더 균일해진다.

수성 색연필의 혼색 경로는 두 가지다. 건식 레이어링과 습식 블렌딩. 습식 블렌딩은 물의 양에 따라 번지는 정도가 달라지므로, 원하는 결과를 내려면 손에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심 경도와 혼색의 관계는 일반 연필과 비슷한 원리로 작동한다. 연필 심 경도 차이와 용도에서 그라파이트와 점토 비율이 경도를 결정하는 방식을 다뤘는데, 색연필 심도 필러 비율이 높을수록 단단해지고 발색은 약해진다.

어떤 색연필을 골라야 할까

선명한 발색과 레이어링이 주목적이라면 유성, 그중에서도 오일 기반. 미술용 컬러링이나 스케치에서 선호하는 이유가 있다.

수채화 질감을 표현하고 싶고 물과 붓을 쓸 환경이 된다면 수성. 단, 건식으로만 쓴다면 수성의 가장 큰 장점을 쓰지 않는 셈이다.

사무용이나 간단한 색 구분이 목적이라면 왁스 기반 유성으로 충분하다. 심이 부드럽고 발색이 안정적이다. 다만 종이 표면 상태에 따라 발색이 달라질 수 있다. 종이 평량과 번짐의 관계에서 확인했듯, 두꺼운 종이일수록 색이 더 선명하고 고르게 나온다.

색연필을 고를 때 "유성인가 수성인가"보다 정확한 질문은 "왁스 기반인가 오일 기반인가, 그리고 물을 쓸 것인가"다. 제품 설명에 보통 oil-based, wax-based, watercolor pencil로 표기가 있으니 구매 전에 확인하면 된다.

조사를 시작한 건 색연필 한 통에서 빨간색만 30분 만에 반 토막 난 이후였다. 빨간 안료 입자가 다른 색보다 크고 거칠어서 마찰이 강하다는 설이 있다. 실측은 못 했다. 지금은 그냥 빨간 색연필을 두 자루씩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