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 매대의 30cm 자는 보통 세 갈래다. 투명한 아크릴 자, 가벼운 알루미늄 자, 묵직한 스테인리스 자. 눈금은 셋 다 똑같이 생겼는데 가격은 몇 배씩 벌어진다. 눈금이 같다면 대체 무엇에 값을 매기는 걸까. 가위 날을 정리한 글 끝에 예고한 대로, 이번에는 직선의 최종 책임자인 자 차례다.
결론부터 말하면 자의 정확도는 눈금이 아니라 눈금을 지키는 능력에서 갈린다. 자 눈금에는 허용 오차 규격이 있고, 소재는 그 오차가 온도와 세월 앞에서 얼마나 버티는지를 정한다. 이 글은 자 눈금의 오차 규격, 소재별 열팽창, 눈금 새김 방식, 자 두께가 만드는 읽기 오차까지 공개 규격과 재료 물성값 기준으로 정리한다.
자 눈금에도 오차 규격이 있다: JIS B 7516
자는 감으로 만드는 물건이 아니다. 금속 자의 경우 일본 공업 규격 JIS B 7516이 눈금 허용 오차를 등급으로 정해 두는데, 1급 기준으로 전체 길이 500mm 이하에서 ±0.15mm다. 30cm 스틸 자라면 눈금 전체가 0.15mm 안쪽에서 놀아야 규격품이라는 뜻이다. 국산 제도용 자들도 대체로 이런 계열의 규격을 따라 만들어진다.
이 규격에서 눈여겨볼 것은 숫자보다 단서 조항이다. 오차는 20도씨에서 잰다고 온도가 못 박혀 있다. 규격을 쓰는 사람들이 온도를 명시했다는 것은, 온도가 바뀌면 길이도 바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 변화 폭은 소재마다 다르다. 여기서부터 소재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재별 열팽창: 아크릴 자는 스틸 자의 7배 늘어난다
물체가 온도에 따라 늘고 주는 정도는 선팽창계수라는 물성값으로 공개되어 있다. 재료마다 1도 오를 때 길이가 얼마나 늘어나는지를 나타낸 수치다. 공개 물성값 기준으로 스테인리스강은 대략 10, 알루미늄은 23, 아크릴(PMMA)은 70 언저리다(단위는 100만분의 1/도씨). 순위가 이미 결론을 말해 준다.
30cm 자로 계산하면 체감이 온다. 겨울 창가와 여름 책상 사이쯤 되는 온도 차 10도에서, 스테인리스 자는 약 0.03mm, 알루미늄 자는 약 0.07mm, 아크릴 자는 약 0.21mm 늘어난다. 스테인리스와 알루미늄은 규격 허용 오차 ±0.15mm 안에 여유 있게 머무는데, 아크릴은 온도 변화만으로 그 허용 폭을 넘어선다. 규격이 금속 자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이유를 소재 물성이 역으로 설명해 주는 셈이다.
다만 이 숫자에 겁먹을 필요는 없다. 0.2mm는 노트에 밑줄을 긋는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오차다. 문제가 되는 것은 부품 도면이나 재단처럼 0.5mm가 일이 되고 안 되고를 가르는 판이고, 그 판에서만 소재가 정확도의 문제가 된다.
눈금 새김 방식: 인쇄는 닳고 각인은 남는다
소재가 가르는 두 번째 것은 눈금의 수명이다. 아크릴 자의 눈금은 대부분 잉크 인쇄라서 오래 쓰면 자주 닿는 구간부터 지워진다. 지워진 눈금은 복구할 방법이 없다. 스틸 자의 눈금은 표면을 파내는 각인이나 부식 처리(에칭)가 기본이라 잉크가 아니라 요철로 존재한다. 닳아서 흐려질 수는 있어도 지워지지는 않는다.
눈금의 위치도 설계 사항이다. 자 끝면에서 바로 0이 시작하는 자는 모서리가 닳으면 0점부터 통째로 틀어진다. 눈금 앞에 여백을 두고 0을 시작하는 자는 그 마모를 피해 간다. 대신 끝면 0 방식은 벽에 붙여 대고 잴 수 있다는 실용적 장점이 있어서, 어느 쪽이 좋다기보다 용도가 다른 설계다. 규격 숫자 하나, 눈금 위치 하나에도 이런 거래가 접혀 있다.

자 두께와 시차: 눈금을 비스듬히 보면 생기는 오차
정확한 자를 쥐고도 틀리게 재는 방법이 있다. 시차 때문이다. 시차란 보는 각도에 따라 눈금과 대상이 어긋나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자의 눈금은 자 윗면에 있고 종이는 자 밑에 있으니, 둘 사이에는 자 두께만큼의 간격이 있다. 시선이 수직이면 문제가 없지만, 비스듬히 보는 순간 두께가 오차로 번역된다. 두꺼운 자일수록 크게 틀린다.
얇은 스틸 자가 정밀 작업의 기본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두께 1mm 안팎이면 시차가 끼어들 틈 자체가 줄어든다. 투명 아크릴 자 중에 눈금을 아랫면에 인쇄한 제품이 있는 것도 같은 목적이다. 투명한 소재라서 가능한 수로, 눈금을 종이에 바로 붙여 시차를 지우는 설계다. 각도기의 중심 표시가 정확히 종이에 닿도록 만드는 것도 같은 계열의 고민이다. 소재의 약점을 소재의 장점으로 갚는 설계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용도별 자 고르는 법: 긋는 자와 재는 자, 그리고 대는 자
정리하면 자는 세 가지 일을 하고, 일마다 적임자가 다르다. 노트에 선을 긋고 줄간격을 맞추는 일상용이면 투명 아크릴이 편하다. 아래 글씨와 선이 비쳐 보이는 것은 다른 소재가 못 주는 장점이고, 0.2mm의 열팽창은 이 판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 길이를 정확히 재는 일, 도면과 재단이면 각인 눈금의 얇은 스틸 자다. 그리고 커터의 가이드로 대는 자는 무조건 스틸이어야 한다. 아크릴 자에 커터를 대면 날이 자를 파먹으면서 직선 가이드 자체가 울퉁불퉁해진다.
필요 없는 경우도 말해 두자. 책상에서 하는 일이 밑줄 긋기와 택배 상자 크기 어림이 전부라면 소재 논쟁은 통째로 남의 이야기다. 필통에 있는 아무 자나 계속 쓰면 된다.
선팽창계수 세 개를 곱해 보자고 스프레드시트를 또 열었다. 0.03mm와 0.21mm의 차이를 아는 사람이 됐지만, 내 책상에서 그 정밀도를 요구하는 일은 아직 없다. 도구의 스펙을 이해하는 속도가 도구를 쓸 일이 생기는 속도보다 언제나 빠르다. 이 격차를 어디에 쓸지는 다음 궁금증이 정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