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째 쓰던 다이어리의 고무밴드가 어느 순간 헐거워졌다. 처음엔 표지를 야무지게 붙잡아주던 밴드가 이제는 손을 놓으면 스르르 벌어진다. 새 걸로 갈아볼까 하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이 고무밴드는 왜 늘어나기만 하고 원래 길이로 돌아오지 않는 걸까.
흔히 "고무가 삭았다"고 뭉뚱그리지만, 찾아보니 삭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서로 다른 고장이었다. 다이어리 고무밴드가 헐거워지는 원리, 삭아서 끊어지는 원리, 그리고 요즘 늘어나는 실리콘 밴드가 라텍스보다 정말 나은 선택인지를 소재 자료를 기준으로 정리했다.
다이어리 고무밴드가 헐거워지는 이유
고무밴드가 헐거워지는 건 삭아서가 아니라 고분자 사슬이 늘어난 상태로 재배열됐기 때문이다. 고무줄 제조사가 정리한 용어로는 이 현상을 "영구변형(permanent set)"이라 부르고, 원인은 크리프(creep)라는 점탄성 거동이다. 고무를 이루는 긴 사슬 분자는 힘을 받아 늘어나면 원래 얽혀 있던 모양으로 완전히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배열로 미끄러져 자리를 잡는다.
클립보드 집게의 판스프링이 금속 피로로 약해지는 것과는 결이 다른 고장이다. 금속은 반복 변형으로 미세 손상이 쌓여 약해지지만, 고무는 사슬 자체가 지친 게 아니라 물리적으로 새 위치로 밀려난 것이다. 그래서 식혔다 늘렸다 해도 원래 탄력이 돌아오지 않는다. 온도를 낮추면 크리프 속도는 느려지지만, 이미 재배열된 사슬을 되돌리지는 못한다.
고무밴드가 삭아서 끊어지는 이유
삭아서 표면이 갈라지고 끊어지는 현상은 늘어짐과는 별개로, 공기 중 오존이 고무 분자의 이중결합을 끊어내는 화학반응이다. 천연고무(라텍스)는 반복 단위마다 탄소 이중결합을 갖고 있는데, 오존이 이 결합을 공격해 사슬을 끊고 표면에 잔균열을 만든다.
여기서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오존 균열은 고무가 당겨져 있을 때만 자란다는 것이다. 이중결합이 오존에 노출되려면 사슬이 늘어나 있어야 하고, 늘어나 있지 않으면 균열이 자라지 않는다. 즉 다이어리를 다 채운 뒤에도 고무줄을 계속 팽팽하게 당긴 상태로 방치하면(내 다이어리가 딱 이 상태였다), 느슨하게 걸어둔 것보다 삭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뜻이다.
라텍스와 실리콘, 소재로 보면 뭐가 다른가
라텍스와 실리콘은 노화 양상이 다른데, 이유는 분자 뼈대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라텍스는 탄소-탄소 이중결합으로 이어진 뼈대라 자외선과 오존에 취약하고, 실리콘은 규소-산소(Si-O) 결합으로 이어진 뼈대라 결합에너지가 높아 자외선과 열에 더 오래 버틴다는 게 소재 업계의 공통된 설명이다. 실리콘 고무는 장기간 햇빛에 노출돼도 잘 갈라지지 않고, 산업용 실리콘의 내후 수명은 수십 년 단위로 보고되는 반면 보호 처리 없는 천연고무는 열·오존·햇빛 아래서 상대적으로 빨리 삭는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실리콘이 모든 면에서 우월한 건 아니다. 같은 자료들은 천연고무가 탄성과 인장강도에서는 여전히 앞선다고 짚는다. 처음 끼웠을 때의 팽팽한 조임감은 라텍스 쪽이 낫고, 자외선·오존에 오래 노출되는 조건에서는 실리콘 쪽이 유리한 셈이다. 저가 다이어리에 흔한 검은 고무줄이 대개 라텍스 계열인 이유도 초기 탄력과 단가에서 이쪽이 유리해서일 것이다.

다이어리 고무밴드, 무엇을 고를까
매일 펼치고 덮는 다이어리라면 고무줄이 받는 인장 횟수 자체가 많으니 크리프도, 오존 균열도 빨리 쌓인다. 이런 용도라면 실리콘 소재나 폭이 넉넉한 밴드를 고르는 쪽이 수명 면에서 유리하다. 반대로 어쩌다 한 번 펼치는 다이어리나 장식용으로 세워두는 다이어리라면 소재 차이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 어차피 반복 인장이 적어 두 소재의 격차가 벌어질 조건 자체가 잘 안 생긴다.
고무줄 하나로 노트를 묶는 트래블러스노트처럼 고무줄이 구조의 핵심인 물건이라면 교체 가능 여부부터 확인하는 게 낫다. 반대로 고무줄 노화 자체가 신경 쓰인다면 자석이나 스냅 단추로 잠그는 노트가 이 문제를 아예 피해 가는 대안이 된다.
다이어리 고무줄 하나 갈아 끼우면 될 일이었는데, 결국 오존 균열 메커니즘까지 뒤지고 있었다. (원래 5분짜리 검색이었다.) 다음 다이어리는 고무줄 없는 자석 잠금으로 사볼까,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