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반 안쪽 폭을 재려고 30cm 자를 댔다. 한 번에 안 닿아서 자를 밀고 당기며 눈금을 이어 붙였는데, 이어 붙이는 지점마다 오차가 쌓이는 게 뻔히 보였다. 접이식 자를 하나 살까 싶어 검색창을 열었다가 멈칫했다. 목공 도구 코너에는 흔한데 문구 매대에는 잘 안 보인다. 접으면 부피가 줄어드는 자가 왜 이렇게 드문가. 접이식 자와 일자형 자가 휴대성과 눈금 정확도를 정말 맞바꾸는 관계인지, 공개된 규격과 제조사 자료를 기준으로 따져봤다.

접이식 자와 일자형 자, 구조부터 다르다

일자형 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덩어리다. 소재가 나무든 금속이든 아크릴이든, 눈금이 찍힌 면 전체가 하나의 강체로 붙어 있다. 접이식 자는 이 강체를 10~20cm 단위 여러 구간(링크)으로 잘라 힌지로 이어 붙인 물건이다. 스위스 제조사 SOLA에 따르면 자사 힌지는 "고급 에폭시 코팅 스웨덴산 스틸"로 만들고, 각 힌지가 스프링과 걸쇠(래치) 기능을 함께 갖도록 설계한다. 접었다 펴는 동작을 15,000회 반복하는 내구성 시험도 거친다고 밝힌다.

구조가 다르면 정확도의 결정 요인도 달라진다. 일자형 자는 소재 하나의 물성(열팽창, 눈금 새김 방식)만 신경 쓰면 되지만, 접이식 자는 여기에 힌지 개수만큼의 변수가 더 붙는다. 자 소재별 정확도를 다룬 글에서 짚었듯 일자형 자도 온도와 눈금 새김 방식에 따라 오차가 생긴다. 접이식 자는 그 위에 힌지라는 오차 요인을 하나 더 얹은 셈이다.

여러 개의 목재 접이식 자 구간이 서로 다른 각도로 겹쳐 놓인 클로즈업, 눈금 숫자가 보인다
구간마다 힌지로 이어진 접이식 자, 펼치면 이렇게 여러 조각이다

자 정확도에도 등급이 있다: EU 접이식 자 정확도 등급

접이식 자에는 아예 국제 규격으로 정한 정확도 등급이 있다. 스위스 제조사 KWB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EU 지침 2014/32/EU(2016년 이전 2004/22/EC)는 접이식 자를 세 등급으로 나눈다. 오차 한계는 "a + b×L" 공식으로 계산하는데, L은 미터 단위로 반올림한 길이다. 2m 자 기준으로 환산한 등급별 허용 오차는 아래와 같다.

등급 2m 기준 허용 오차 주로 해당하는 소재
Class I ±0.3mm 금속 정밀 측정 도구, 핸드헬드 레이저
Class II ±0.7mm 금속 접이식 자·줄자 다수
Class III ±1.4mm 나무·플라스틱 접이식 자 (표준)

KWB 자료는 "나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접이식 자의 통상 표준이 Class III"라고 명시한다. 반대로 Class II는 "주로 금속 소재 접이식 자에 부여"된다. 등급이 낮다고 불량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목재·플라스틱 접이식 자는 애초에 Class III 규격에 맞춰 설계되고, 그 규격 안에서는 정상 제품이다. 다만 같은 2m를 재는 일자형 금속 자와 비교하면 자릿수가 다른 오차를 안고 시작한다는 뜻이다.

일자형 자와 접이식 자의 힌지 부분을 비교한 단면 모식도, 접힌 지점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각도 오차 표시
힌지 하나마다 유격이 조금씩 쌓인다 (모식도)

접이식 자가 정확도에서 밀리는 이유: 힌지 유격

등급 차이의 실체는 힌지에 있다. 목공 커뮤니티 소모임 조사에서도 "접이식 자는 계속 쓰다 보면 힌지에 유격(play)이 생기기 때문에 극도로 정밀한 측정에는 믿고 쓸 수 없다"는 의견이 반복해서 나온다. 힌지는 회전하는 부품이라 핀과 구멍 사이에 미세한 틈이 있어야 움직인다. 그 틈이 곧 오차의 시작점이다. 구간 하나에서 생기는 틈은 아주 작아도, 구간이 여러 개 이어지면 벌어진 각도가 누적된다. 10구간짜리 1m 자라면 힌지가 아홉 개, 오차가 쌓일 지점도 아홉 개라는 뜻이다.

일자형 자에는 애초에 이 변수가 없다. 강체 하나라 접힌 지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밀 측정을 다루는 자료들은 대체로 "양질의 스틸 자는 정밀 측정과 마킹에 매우 정확한 도구"라고 못 박고, 접이식 자에는 이런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SOLA가 힌지 하나마다 세 군데씩 윤활유를 바르고 15,000회 내구성 시험을 하는 이유도 결국 이 유격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서다. 힌지의 품질관리가 접이식 자 정확도의 사실상 전부라는 뜻이기도 하다.

휴대성은 접이식 자의 확실한 강점

정확도만 보면 접이식 자가 불리하지만, 애초에 접이식 자가 팔리는 이유는 정확도가 아니다. 부피다. 1m짜리 접이식 자는 접으면 대략 13cm 안팎, 손바닥 하나에 들어오는 크기로 줄어든다. 같은 1m를 재는 일자형 자는 아무리 얇게 만들어도 길이 1m 그대로 들고 다녀야 한다. 가방이나 공구함에 꽂고 다니는 처지에서는 이 차이가 크다.

1m 접이식 자가 펼쳤을 때와 접었을 때 길이를 나란히 비교한 모식도
1m 자가 접히면 손바닥 크기로 줄어든다 (모식도)

줄자와 비교해도 접이식 자만의 자리가 있다. 줄자는 측정할 때 일정한 장력을 걸어야 눈금이 맞는데, 그 장력을 사람 손으로 매번 똑같이 주기가 쉽지 않다. 접이식 자는 펼치는 순간 힌지가 걸쇠로 고정되어 강체처럼 버티기 때문에, 위로 뻗어 재거나 벽에 대고 수직으로 재는 상황에서 줄자보다 다루기가 편하다는 목공 종사자들의 경험담이 여럿 있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짧은 포켓 자와 접이식 자를 함께 챙기고, 줄자는 따로 두는 조합이 흔하다.

그래서 언제 접이식, 언제 일자형을 쓰나

결론은 재는 대상의 허용 오차에 달렸다. 도면 치수나 커터로 긋는 재단선처럼 mm 단위가 결과를 가르는 작업이면 일자형 금속 자나 Class II 이상 접이식 자를 쓰는 쪽이 안전하다. 반대로 가구 배치, 선반 안쪽 폭, 택배 상자 크기처럼 몇 mm 어긋나도 문제없는 대략적인 치수라면, 접었을 때 부피가 확 줄어드는 목재·플라스틱 접이식 자가 실용적이다. 이미 줄자가 있고 위아래로 뻗어 잴 일이 드문 사람이라면 접이식 자를 새로 살 이유는 딱히 없다. 줄자로도 충분한 범위이기 때문이다.

접이식 자 힌지 개수를 세다가 EU 규격 원문까지 뒤졌다. 0.3mm와 1.4mm의 차이를 알게 됐지만, 내 책상에서 그 정밀도가 필요한 순간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선반 폭은 결국 눈대중으로 다시 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