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에 수정액을 바르고, 다 말랐다고 판단했고, 틀렸다. 위에 쓴 볼펜 글씨가 덜 마른 흰 바닥과 함께 밀리면서 서류는 아까보다 더 심란해졌다. 다시 뽑은 서류에는 수정테이프를 썼는데, 이번엔 긋자마자 바로 쓸 수 있었다. 같은 "흰색으로 덮기"인데 왜 하나는 기다림을 요구하고 하나는 그러지 않는가. 지우개 글에서 미뤄둔 숙제, 잉크를 지우는 도구들의 구조를 오늘 따져본다.
원리는 같다, 덮는다
먼저 공통점부터. 지우개가 흑연을 데려가는 도구라면, 수정액과 수정테이프는 잉크를 지우지 않는다. 이산화티타늄이라는 백색 안료로 잉크 위를 덮을 뿐이다. 이산화티타늄은 불투명도가 매우 높아서 얇게 발라도 아래를 가리는데, 흰 페인트나 선크림에 들어가는 것도 이 안료다. 두 도구의 진짜 차이는 안료가 아니라 그 안료를 종이에 옮기는 방식에 있다.
수정액, 액체로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린다
수정액은 안료를 용제에 풀어놓은 페인트다. 바르면 용제가 증발하면서 안료 막이 남는다. 이 구조의 장점은 유연함이다. 액체라서 요철이나 접힌 자국, 좁은 틈에도 스며들 듯 발리고, 두껍게 겹쳐 바르면 진한 잉크도 확실히 가려준다. 단점은 전부 용제의 증발에서 나온다. 마르는 데 시간이 걸리고, 덜 마른 채 쓰면 내 서류처럼 얼룩이 밀리며, 두껍게 마른 막은 나중에 갈라지거나 종이를 뻣뻣하게 만든다. 뚜껑 관리에 실패하면 병째 굳어버리기도 한다. 증발로 일하는 도구는 결국 보관에서도 증발로 죽는 셈이다.
수정테이프, 공장에서 이미 말려서 왔다
수정테이프는 이 발상을 뒤집었다. 마르기를 기다리는 대신 공장에서 이미 건조된 안료 필름을 캐리어 테이프에 발라두고, 현장에서는 압착으로 전사만 한다. 긋는 즉시 필기가 가능한 이유는 애초에 마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막 두께도 균일해서 종이가 울지 않는다.
대신 이 구조에도 약점이 있다. 필름은 평평한 면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접힌 자국이나 요철 위에서는 들뜨고 끊긴다. 얇고 균일한 막은 진한 잉크를 한 번에 못 가려서 두 겹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리고 테이프 헤드가 기계 장치라서 안이 엉키면 남은 테이프와 무관하게 통째로 은퇴해 버린다. 수정액은 굳어서 죽고 수정테이프는 엉켜서 죽는다. 죽는 방식조차 각자의 구조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위에 다시 쓸 때의 궁합
재필기 표면도 다르다. 수정액이 마른 면은 미세하게 매끈한 도막이라 유성 볼펜은 잘 붙지만 수성이나 젤 잉크는 겉돌기 쉽다. 수정테이프 표면도 비슷한 경향이 있는데, 여기에 필압이 세면 필름이 밀리는 문제까지 더해진다. 공개된 사용자 리포트를 종합하면 어느 쪽이든 유성 볼펜이 가장 무난하다는 데로 수렴한다. 잉크 점도가 높아서 표면에 얹히는 방식이라 그렇다는 것이 합리적인 추정이다.
무엇을 기본값으로 둘까
일상적인 서류나 노트 수정은 수정테이프가 기본값이다. 즉시성, 균일한 두께, 그리고 스캔 궁합까지. 수정액의 두꺼운 도막은 스캐너 조명 아래에서 미세한 그림자와 얼룩으로 찍히는 반면, 테이프의 얇은 필름은 티가 훨씬 덜 난다. 제출용이나 스캔용 서류라면 이 차이 하나만으로도 테이프 쪽에 손이 간다. 물론 수정액이 이기는 조건도 명확히 남아 있다. 접히거나 우둘투둘한 면, 넓은 면적, 진한 잉크를 확실히 덮어야 하는 상황이 그렇다. 그리고 둘 다 필요 없는 사람도 있다. 연필 사용자라면 애초에 이 매대가 아니라 지우개 매대가 답이고, 디지털로 쓰는 사람에게는 그냥 백스페이스가 있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서류 두 장 값을 치렀다. 급할수록 마름을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내 자리의 수정액은 서랍 깊은 곳으로 보냈다. 지금쯤 병 안에서 조용히 굳어가고 있겠지만, 그것도 그 나름의 구조적인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