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 아래에 메모를 마스킹테이프로 붙여뒀다. 한 달 뒤 메모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같은 주에 다른 사건도 접수됐다. 벽에 붙였던 테이프를 떼자 벽지 표면이 함께 뜯겨 나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마스킹테이프는 접착력이 약한 테이프가 아니라 떨어짐을 설계한 테이프고, 그 설계에는 점착 등급이 있다. 한쪽에서는 너무 빨리 놓아버리고 다른 쪽에서는 너무 꽉 붙잡는 이 일관성 없어 보이는 물건의 스펙을, 두 사건을 재료 삼아 정리한다.
마스킹테이프가 붙는 원리, 감압접착제
테이프류의 접착은 감압접착제가 담당한다. 이름 그대로 압력을 받는 만큼 붙는 접착제다.
풀이나 본드처럼 굳으면서 붙는 게 아니라, 반고체 상태의 끈끈한 물질이 압력을 받으면 표면의 미세한 요철로 흘러들어 밀착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세게 문지를수록 접촉 면적이 늘어 점착력이 올라가고, 시간이 지나도 서서히 퍼지면서 더 단단히 붙는다. 붙인 직후엔 잘 떨어지던 테이프가 반년 뒤엔 안 떨어지는 그 현상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잘 떨어지는 테이프와 오래 붙는 테이프의 차이
마스킹테이프의 정체성은 낮은 점착 등급이다. 원래 도장 작업에서 붙였다가 깨끗이 떼는 용도로 태어난 물건이라, 점착제를 일부러 약하고 잔사 없게 배합한다.
여기서 맞바꿈이 생긴다. 깨끗이 떨어지는 성질(재작업성)과 오래 붙어 있는 힘(유지력)은 같은 배합비의 양면이라 동시에 최대일 수 없다. 연필 심의 진하기와 단단함이 그랬듯 이것도 하나의 다이얼인 셈이다. 내 모니터 메모는 잘 떨어지는 쪽 끝에 있는 테이프에게 유지력을 기대한, 말하자면 배치 오류였다.
벽지 사건은 정반대편 이야기다. 문제의 테이프는 문구용이 아닌 중점착 제품이었고, 벽지처럼 표면이 약한 곳에서는 점착력이 표면 강도를 그냥 이겨버린다. 테이프가 떨어지는 대신 표면이 뜯기는 것이다. 점착의 세계에서 파괴는 언제나 가장 약한 층에서 일어난다는 원칙이 있는데, 이번엔 그 가장 약한 층이 테이프가 아니라 벽지였다.

마스킹테이프 스펙 표기 읽는 법
제조사 자료들을 모아 보면 소비자용 테이프의 점착력은 대체로 약점착, 중점착, 강점착으로 등급이 나뉘고, 일부는 박리 점착력 수치를 아예 공개하기도 한다.
숫자가 없어도 위치를 추정할 단서는 있다. 다꾸나 데코 문구가 있으면 약점착, 고정이나 라벨 문구면 중점착 이상, 도장 마스킹은 용도 자체가 특화된 별도 축이다. 참고로 와시 테이프의 "와시"는 일본어로 종이(和紙)를 뜻한다. 종이 기재 특유의 손으로 잘 끊기는 성질과 약점착이 늘 세트로 오는 이유가 이 재질에 있다. 그리고 어느 등급이든 공통된 변수로, 점착제는 열과 자외선에 늙는다. 햇빛 드는 창가의 테이프는 점착제가 굳어서 들뜨거나 반대로 끈적한 잔사로 변하기도 한다. 형광펜이 햇빛에 바래는 것처럼 유기물이 공통으로 겪는 운명이다.
용도별 마스킹테이프 점착력 고르는 법
정리하면 선택은 세 갈래다. 다이어리 꾸미기나 임시 표시처럼 뗄 일이 많다면 약점착 와시 테이프. 대신 하중이나 장기 고정은 기대하지 않는다. 메모 고정이나 라벨링처럼 오래 붙어 있어야 한다면 중점착 이상. 대신 벽지나 도장면, 오래된 책 표지처럼 약한 표면에는 쓰지 않거나 뗄 때 낮은 각도로 천천히 당긴다.
그리고 소중한 표면에 붙이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하루쯤 테스트해 볼 것. 테이프 스펙과 표면 강도의 조합은 결국 현장 변수라서, 이 한 번의 테스트가 어떤 스펙시트보다 정확하다.
이미 떼어낸 자리에 끈적한 잔사가 남았다면, 새 테이프 조각을 그 위에 붙였다 떼기를 반복하는 것이 통용되는 제거법이다. 점착제가 점착제를 데려가는 방식인데, 지우개가 흑연을 붙여서 떼어내는 것과 같은 원리라는 게 재미있는 지점이다.
모니터 아래 메모는 결국 중점착 테이프로 자리를 옮겼고, 벽지의 상처는 액자로 슬쩍 가렸다. 실패 두 건의 값으로 등급표 하나를 얻었으니, 이 책상의 회계 기준으로는 그럭저럭 흑자다.